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평화를 되돌아 보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평화를 되돌아 보다

거제 포로수용소

거제 포로수용소
위의 사진은 1951년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전쟁포로들의 모습입니다. 맨 뒤에는 목발을 짚고 있는 포로 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포로수용소는 왜 거제에 있었을까요?

1950년에 시작된 전쟁은 3년 1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행되었습 니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편에 사로 잡혀 포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을 전쟁포로라고 하는데 국제 사회는 전쟁 중에 불필요한 희생을 막고자 제네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협약에는 전쟁포로가 발생하면 인도적으로 보호하였다가 적대 상태가 해결되면 석방 및 송환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6·25 전쟁 기간에 전쟁포로가 급격하게 많이 발생한 시기는 1950년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이후입니다. 한반 도의 남쪽까지 진격하였던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강 이남 지역에 고립되면서 수많은 포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새로운 수용시설을 부산, 마산 등지에 지었습니다. 두 번째는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시기로 이때 포로 수가 또 다시 크게 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대규모 포로 수용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엔군은 새로운 포로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거제도에 설치하기로 하였습니다.
유엔군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지은 이유에는 포로들을 섬에 가두어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1951년 6월까지 거제 포로수용소의 포로 수는 17만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당시 거제 인구가 4만여 명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수의 사람이 섬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예상보다 많은 포로를 수용하면서 수용소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로들에게 제공되는 의식주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포로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기는 했 으나 옷과 식량 등의 생활 물자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예상 보다 많은 포로의 수용은 경비 병력의 증가와 함께 천막 등의 시설을 늘려야 했고 이 때문에 비용 부담도 점차 증가하였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지 않았던 전쟁포로는 위생 문제와 식사 문제로 불만이 터져 나왔고, 많은 포로를 감당해야 했던 경비병들의 긴장감도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포로들의 불만은 소동으로 나타났고, 소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포로와 경비병 사이의 충돌도 빈번해졌습 니다. 이러한 긴장 상황은 다른 방향에서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거제 포로수용소의 긴장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어 갔나요?

몇 차례의 공방전 이후 전쟁이 교착 상태로 장기화하자 양 진영은 전쟁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이에 1951년 7월부터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습니다. 휴전회담의 소식은 사람들에게 전쟁이 곧 끝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었습니다. 수용소에 있는 포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제 포로수용소 공원 조형물

거제 포로수용소 공원 조형물
이 사진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공원에 조성된 조형물입니다. 국군과 인민군으로 표현된 두 군인은 총을 등 뒤에 매고 철조망을 거두고 있습니다. 전쟁의 고통을 온전히 없애고 평화를 되찾는 방법은 총을 등진 채 철조망을 함께 치우는 국군과 북한군을 표현한 철모 광장의 조형물에서 확인할 수 있습 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휴전회담은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2년을 끌어 갔습니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휴전선의 위치를 두고 4개월이나 논쟁하였고, 포로 송환 방법을 두고 18개월이 라는 시간을 끌었습니다.
포로 송환 방법에서 북한과 중국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원래의 나라로 돌려보내자는 자동 송환을 주장하였고, 미국은 전쟁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6·25 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북한군을 반란집단으로 규정해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얽혀 협상이 난항을 보였던 것입니다.
당시 수용소에 있는 포로들도 각자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포로 중에는 원래 북한 출신으로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들 중 북한의 체제를 거부하며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남한 출신이나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강제로 징집되어 북한 군이 되었다가 포로가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른 상태에서 휴전회담이 2년 이상을 끌자 포로수용소는 수용소의 기능과 다르게 제2의 전쟁터가 되어갔 습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수용소 내 포로의 자치를 허용하면서 북한을 지지하는 친공 포로조직과 남한 정부를 지지하는 반공 포로조직이 만들어 졌고 이들 사이에 치열한 체제 충성 전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포로들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전쟁이 끝난 이후 자신에게 닥칠 상황을 두려움 속에서 기다렸습니다. 이 같은 심리적 불안정 속에서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이들은 북한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충성심을 보여야 했고, 남한에 남기를 원했던 이들은 북한이 아닌 자유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한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격렬한 몸부림은 양 집단의 중간지대에 놓였던 사람일수록 더 심하게 정신적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포로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나라의 깃발을 흔들기도 했고, 심지어는 본인의 몸에 문신을 새겨 충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 충성 경쟁으로 포로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심해지자 포로수용소는 결국 포로들을 분산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심사를 통해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분리하여 이동시켰 습니다. 포로 심사를 거부하던 친공 세력은 포로수용소장인 미군의 돗드 준장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습니다.
1953년 6월에는 이승만이 3만여 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 하여 휴전 협정 자체가 결렬될 뻔했으나,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으므로 1953년 7월 27일에 마침내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휴전 협정 과정에서 가장 협의하기 어려웠던 포로의 처리 문제는 포로가 원래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결정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포로 송환은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총 88,596명을 서로 교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유엔군이 북한·중국 측에 인도한 포로가 75,823명, 북한·중국 측이 유엔군에 인도한 포로는 국군 7,682명을 포함한 12,773명이었습니다. 각자 원하는 곳으로 돌아갔으나 정작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역과 사상의 선택지 중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88명으로 이들은 우리나라의 어느 곳도 택하지 못하고 중립국 또는 제3국을 선택하여 인도로 떠났습니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광장 (최인훈) 일부 –

전쟁은 사람들의 명확히 갈랐으나 어느 쪽에도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전후 남북한 사회를 이념에 따른 경직되고 긴장된 공간으로 몰아갔습니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경쟁자를 처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등 생각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전쟁포로는 어떻게 대우하고 있나요?

적십자

적십자

적신월

적신월

적수정

적수정

이 상징을 본 적이 있나요? 세 가지 모양의 이 상징들은 각각 적십자, 적신월, 적수정 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장은 왜 만들어졌고 국제 사회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을까요?
인류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 본의 아니게 상대국 군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이를 ‘전쟁포로’라고 합니다.
과거 전쟁포로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해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 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장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다. ⋯ (중략) ⋯ 전쟁의 목적은 적국을 격파하는데 있으 므로 그 방위자가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한 이를 살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순간 적 또는 적의 도구라는 기능을 버리고 다시 단순한 인간으로 되돌아간 것이므로 이제 그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국제 사회는 전쟁 중에 발생하는 불필요한 희생을 막고자 제네바 협정을 체결하였 습니다. 제네바 협정은 1864년 ‘전장에 있는 부상병의 상태 개선을 위한 조약’을 시작으로 1949년까지 ‘조난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 ‘전시에 있어 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약’ 등 4개의 조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협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 1949년에 개정한‘전쟁 포로의 대우에 대한 협약’일부를 함께 볼까요?

제4편 포로 신분의 종류
제1부 직접 송환 및 중립국에서의 수용
제109조 본조 제3항의 규정에 따를 것을 조건으로 충돌 당사국은 중상 및 중병의 포로를 그의 수와 계급의 여하를 불문하고 그들이 여행에 적합할 때까지 치료한 후에 다음 조 제1항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하여야 한다. ⋯ (중략) ⋯ 충돌 당사국은 장기간 포로의 신분으로 있었던 건강한 포로의 직접 송환 또는 중립국 내에서의 억류에 관하여 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 본조 제1항에 의하여 송환의 대상이 되는 부상자, 또는 병자인 포로는 적대 행위의 기간중 그의 의사에 반하여 송환되어서는 아니된다.
제2부 적대행위 종료 시의 포로의 석방과 송환
제118조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 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 적대행위의 종료를 위하여 충돌 당사국간에 체결된 협정에 상기 취지의 규정이 없거나 그러한 약정이 없는 경우에는 각 억류국은 전항에 정하는 원칙에 따라 지체 없이 송환 계획을 작성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전항의 어느 경우에라도 채택된 조치는 포로에게 통지하여야 한다.

이 조항을 보면 전쟁 포로를 다룰 때 포로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호하도록 하는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전쟁 중에 다친 포로는 반드시 치료하고, 전쟁이 끝나면 본인에 의사에 따라 본국으로 또는 중립국으로 송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은 일어나서도 안 되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제네바 협정에 따라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보장하자고 국제 사회는 함께 약속하였습니다.

6·25 전쟁으로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다6·25 전쟁으로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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