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수탈에 맞서다

차별과 수탈에 맞서다

조선형평사 제7회 전국대회 포스터(좌)와 조선형평사 제8회 전국대회 포스터(우)

조선형평사 제7회 전국대회 포스터(좌)와 조선형평사 제8회 전국대회 포스터(우)
강렬한 느낌을 주는 두 장의 포스터입니다. 검정과 빨강, 흰색의 대조가 선명한데, 무엇인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합니다. 목놓아 외치는 이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언제 만들어진 자료이며, 손에 든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들이 외친 ‘형평’은 무엇일까요?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지만, 여러분이 마치 역사가가 된 듯 포스터의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천천히 관찰해봅시다.
왼쪽 포스터부터 볼까요. 깃발을 불끈 쥔 사람이 보입니다. 허름한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팔과 주먹, 어딘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머리를 보니 보통의 사람들이 쓰는 것과는 다른 모양의 모자인 것 같기도 한데,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 일까요?
빨간색과 흰색이 들어가 있는 깃발에는 ‘모여라! 자유 평등의 기치 아래로’라 적혀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형평(衡平)’이라 적힌 동그란 마크도 보입니다. 이 사람이 가리키고 있는 어떤 방향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른쪽 포스터도 천천히 볼까요.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역시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강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손에 든 것은 무엇일 까요?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지만 예전에 소나 돼지 등 고기를 잡아 팔 때 사용하던 저울입니다. 이 저울을 힘있게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니 이 사람의 팔에 글이 보입니다. ‘모여라. 형평사 총본부 기치 아래로’라 적혀있습니다. 왼쪽 어깨에는 옆의 포스터에서 본 그 깃발도 보입니다. 역시 ‘형평’이라는 마크가 보이고, 함께 작은 글씨로 ‘인생권과 생활권을 획득하자!’라고 적혀있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인권과 생존권을 획득하자는 의미입니다.
여기 포스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깃발을 든 한 남성이 또 보입니다. 깃발에는 조금 전에 본 ‘형평’이라는 글을 가로로 풀어서 적어 놓았습니다. 세로로 쓰여진 아래의 글에는 ‘천차만별의 천시를 철폐 하자’, ‘전 조선에 흩어져 있는 형평 계급아 단결하자’라 적혀있습니다.
온갖 차별과 천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형평 계급’은 누구일까요? 그들이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형평’이란 무엇일까요?
형평이란, 균형이 맞거나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조선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조선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이 사람들이 사용한‘형평’이라는 말은 균형을 맞춘 저울처럼 평등한 조선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세상을 꿈꾼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저울 (衡, 형)처럼 차별없이 평등 (平, 평)하게 대우받고 싶다는 상징적 단어입니다.
조선시대 백정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소나 개, 돼지 등을 잡는 일을 맡아 했는데 노비보다도 더 천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되면서 법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사회적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특히 백정에 대한 차별은 집단적 혐오로까지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1909년 일요일 15명의 남녀 백정들이 일반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보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오자, 200여 명의 신도들이 동석 예배를 거부하며 예배당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1923년에는 백정 출신 이학찬이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다가 입학을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목욕탕이나 이발소, 음식점에서도 공공연하게 차별이 행해지는 등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차별과 협오를 받아오던 백정들은 1923년 4월 25일 진주청년회관에서 80여 명의 백정들과 강상호, 장지필 등 지역 활동가들이 모여 ‘형평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형평사 창립 선언문을 통해 백정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없애고 공평과 애정을 사회와 사람의 바탕이라고 선언합니다.

일제 강점기 백정 가옥과 작업 모습

일제 강점기 백정 가옥과 작업 모습
경남 고성의 백정들이 가축의 가죽을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당시 백정들이 살았던 가옥 모습과 함께 백정들의 열악한 삶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형평사는 전국의 백정 후손들과 진보적 사회 운동 단체들로부터 환영받으며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 설립된 지회와 분회에서 토론회와 강연회가 열리고, 정기 대회를 통해 형평의 정신을 확신시켰습니다. 1929년에는 형평사의 기관지인 “정진(正進)”을 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형평사는 창립 시기부터 회원의 자격을 백정만이 아니라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에 그치지 않고 소작쟁의와 여성 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과 연대하였습니다. 민족을 넘어 수평사라는 일본 단체와도 함께 차별 철폐와 인권 신장을 추구하였습 니다. 왜 그랬을까요?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래의 양심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
본사의 중요한 뜻이다. 지금까지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억압을 받아왔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 통곡하고도 피눈물을 금할 수 없다.

형평운동이 일차적으로 백정에 대한 차별과 억압 철폐와 평등한 대우를 위한 것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서 권리와 존엄성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인권 운동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형평사의 활동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백정에 대한 신분차별을 사회적 관습으로 여겨오던 반대 세력들과의 충돌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전통과 관습으로 인해 진주에서는 형평사 창립 직후부터 사회적으로 함께 천대받던 기생이나 노동자·빈민까지도 형평운동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반형평이라는 이름으로 반대 집회가 열린 것입니다. 쇠고기 불매운동은 물론 형평운동 단원들을 신백정이라 놀리고, 학교에서는 여전히 백정의 자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정에 대한 오랜 차별의식과 사회 구조가 쉽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의 형평운동을 둘러싼 갈등을 들여다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해보게됩니다. 백정이라는 신분은 사라졌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곳곳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평운동이 처음 시작된 진주에는 형평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 니다. 본래 진주성 앞에 있었지만, 진주성 주변 정리 사업으로 인해 진주문화예술회관 앞 남강변 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운동기념탑
이 탑은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96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선언일에 맞춰 세워졌습니다.

기념탑의 앞면에는 ‘인간 존엄, 인간 사랑’과 ‘자유 평등, 형평 정신’이라는 글이 나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히 풀지 못한, 그러나 끊임없이 고민하며 풀어나가야 할 어려운 숙제를 새겨 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삶의 주변에서 차별과 혐오를 넘어 서는 인류애를 키워나가길 형평 정신과 함께 기원해 봅니다.

형평사 기관지 창간호(1929년)

형평사 기관지 <정진>창간호(1929년)

백정!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받은 차별의 삶

  • 출생
    이름에 인(仁), 의(義), 효(孝) 등 고상한 글자를 쓸 수 없고, 석(石), 돌(乭), 피(皮)와 같은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함.
  • 주거지역의 제한
    일반인과 섞여 살지 못하며, 죽는 날까지 백정 마을에 머물러야 함. 백정의 마을을 ‘피촌’이라 부름. 마을 밖을 여행할 때는 통행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함.
  • 교육
    서당, 근대 교육기관에 입학 거부 및 차별, 과거시험 응시 불가함.
  • 혼인
    일반인과 혼인 금지. 신랑 신부 말이나 가마 사용 금지. 남자는 상투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함.
  • 혼인
    일반인과 혼인 금지. 신랑 신부 말이나 가마 사용 금지. 남자는 상투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함.
  • 생활
    일반인에게 나이에 상관없이 존댓말 사용 해야 함. 일반인처럼 명주옷과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고, 갓 대신 패랭이 또는 평량갓을 착용해야 함. 지붕에 기와를 얹을 수 없음. 일반 백성과 떨어진 성 밖의 일정 지역에 거주해야 함.
  • 장례
    상복이나 지팡이 사용 불가. 상여 사용불가. 일반인 묘지와 격리된 곳에 매장해야 함.

일제의 수탈에 어떻게 맞섰을까요?

‘조선인 측에 강제로 인상’이라 적혀있는 신문 기사 『동아일보』 (1929.11.6.)

‘조선인 측에 강제로 인상’이라 적혀있는 신문 기사 『동아일보』 (1929.11.6.)
일제 강점기 진영의 일본인 지주 하자마(迫間)가 경영하는 농장에서 소작료를 강제로 인상하자 소작인들의 삶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당시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남 지역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일제의 수탈과 착취가 집중된 대표적 지역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토지 제도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였습니다. 1912년부터 8년간 진행된 이 사업으로 우리 땅에 대한 조사를 마친 총독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이 땅을 일본인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로써 우리 지역 곳곳에도 일본인 지주가 등장하였습니다.
창원의 무라이 농장, 하자마 농장, 사사키 농장이, 밀양의 미쓰시타 농장, 김해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김해농장, 함안의 남해 농장 등 100정보(약 30만평)가 넘는 일본인 농장이 10여 곳이나 있었으니까요. 100 정보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으시죠. 축구장 140개 정도가 되는 엄청난 크기의 면적입니다.
우리 농민의 상당수는 땅을 빼앗기고, 일본인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높은 세율과 불안정한 노동 여건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지역에는 소작 농민들의 저항인 소작 쟁의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하자마 농장 소작쟁의입니다.
1928년 무라이 농장을 인수한 일본 상인 하자마(迫間)는 김해와 창원 일대의 2,800정보(축구장 3,890개)의 땅을 소유하였습니다. 지금의 창원 동읍과 김해 진영 일대의 엄청난 땅에 약 2,000호의 소작 농가를 거느렸습니다. 그는 이들 소작농으로부터 수확량의 70%에 이르는 높은 소작료를 거두며 수탈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인들은 김해·대저·하동·낙동강의 수리조합을 조직해 제방을 쌓고 수문을 만드는 수리 공사를 진행하며, 사람들의 노동력을 무상에 가깝게 착취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농민조합을 만들거나, 일본인 지주에 소작 쟁의로 맞서며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1930년대 김해 낙동강 제방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모습

1930년대 김해 낙동강 제방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모습
사진 가운데의 제복을 입고 있는 일본인 감독관 모습과 왼편 한국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하자마 농장 소작쟁의를 다룬 신문 기사. 『매일신보』(1931.11.12.)

하자마 농장 소작쟁의를 다룬 신문 기사. 『매일신보』(1931.11.12.)
‘하자마 농장의 50여명의 소작인이 하자마 농장의 본점에 쇄도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는 당시 신문 기사입니다. 하자마 농장에서 강제로 소작료를 인상하면서 소작인들은 집단으로 소작 쟁의를 벌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 지주 하자마가 무리하게 소작료를 올리자 1,000명의 소작인 들이 소작 쟁의를 열어 맞섰습니다. 소작인들은 가을에 추수를 거부하며 경상남도청과 김해군청 등을 찾아 호소하고, 농장사무소와 부산에 있던 하자마 농장 본점에서 몇 년간이나 농성을 이어가 결국 소작료를 인하 시켰습니다. 하자마 농장의 소작쟁의는 1934년 총독부가 조선 농지령을 공포하는 계기를 만든 치열했던 생존권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에게 우리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남의 땅을 빌려 생명줄을 어렵게 이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내 땅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당했기 때문입 니다. 지주들은 소작료를 올리거나 여러 가지 부담을 소작농에게 떠넘겼으며, 일부 지주들은 쟁의를 벌이는 농민을 쫓아내거나 농민들 사이에 소작권을 둘러싼 경쟁을 붙여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도 하였으니까요. 따라서 농민운동은 인권의 기본이 되는 생존권 운동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을 온전하게 되찾는 독립운동의 출발 점이었습니다.

형평운동의 국제적 연대

수평사(水平社) 총본부 깃발 ‘형관기(荊冠旗, 가시관기)’
1930년 개최된 전국 대회 포스터

백정과 비슷한 처지였던 일본 부락민 해방 단체인 수평사(水平社) 총본부 깃발 ‘형관기(荊冠旗, 가시관기)’와 1930년 개최된 전국 대회 포스터.
왼편 가시관 모양의 형관기는 일본의 수평사 단원이었던 사이코만키치(西光万吉)가 고안한 것으로, 검은 바탕은 암흑의 차별사회를, 붉은색은 해방에 대한 정열을 상징합니다. 가시관은 예수가 처형될 때 썼던 것으로 수난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본의 부락민의 차별과 수난을 깃발에 담고 있습니다.

문학 속에 비친 백정의 삶과 형평운동

문학 속에도 백정의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개벽에 실린 홍사용의 봉화가 켜질 때와 1927년에 조선지광에 발표된 조명희의 낙동강이라는 소설이 대표적입니다. 1923년 형평사가 창립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던 때에 쓰인 이 두 작품은 모두 백정의 딸을 주인공으로 식민지 조선의 시대상과 백정들의 처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명희는 낙동강에서 백정 출신 여성 운동가 로사를 통해 백정 신분과 사회적 계급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다음은 낙동강의 일부분입니다.

“그녀 역시 백정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려고 고등보통학교까지 졸업한 후 여교사가 되었으며, 함경도에 부임해 있다가 방학을 이용해서 이곳에 와 있었던 터였다. 딸의 교사 부임에 하던 수육업까지 그만둔 부모는 이해 여름의 싸움 후 다시 학교로 돌아 가지 않고 동맹회 일에 오가는 딸을 야단쳤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로사는 이처럼 부모로부터 야단을 맞고 나면 성운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하곤 했다. 그러면 성운은 그녀 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우도록 각성을 시켰다. 이렇게 해서 성운과 로사는 사랑의 감정에서 사상의 힘으로 굳건히 동지적 결속을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로사라는 이름 역시 로사 룩셈부르크 이야기를 하였을 때 성운이 지어 준 것이었다.”

광복 이후 작품으로는 1962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된 황원순의 장편소설 일월이 대표적입니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부산일보에 연재된 정동주의 일어서는 혼이라는 작품도 있는데, 여기에는 백정들의 삶이 판화로 표현되어 시각적 효과를 더했습니다. 정동주는 1991년 백정의 삶을 다룬 대하소설 백정을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문학 속에서 역사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을 꿈꾸다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을 꿈꾸다
끌려간 사람들끌려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