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을 꿈꾸다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을 꿈꾸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 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 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
사진에는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글자가 보이며, 앞줄 왼쪽 네번째 안창호, 둘째 줄 맨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여운형 등이 보입니다. 이들이 모여 논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말은 언제부터였을까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문장은 우리나라 헌법 제1조의 내용입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헌법에 들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광복 이후, 1948년에 첫 번째로 만들어진 제헌 헌법부터일까요?
아닙니다. 이 문장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 4월 11일에 발표된 대한 민국 임시 헌장 제1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4.11.)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 정부가 임시 의정원의 결의에 따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信書),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 (중략) ⋯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

1919년, 이 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네, 바로 온 나라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저항했던 3·1운동이 있었던 해입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힘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헌장이 만들어졌습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모인 29명의 독립운동가들은 임시 의정원을 만들고,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임시 의정원은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헌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임시헌장은 일제 강점기의 시련 속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만든 첫 헌법인 것 입니다. 이 첫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만든 첫 헌법, 내용이 어떻습니까?10개 조항으로 된 짧은 문장이지만 현재 우리 헌법의 뼈대가 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첫머리인 제1조를 볼까요?‘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라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죠. 나머지 조항에서는 우리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임시헌장의 서문에 해당하는 선포문을 볼까요?

신인(神人)의 일치로, 중외(中外)가 협응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지 30여 일 만에
평화적 독립을 300여 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 정부는
항구적이고 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우리 자손 만민에게
대대로 전하기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한다.

선포문에는 임시정부가 3・1운동에 참가한 국민의 지지로 성립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대한제국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은 대한국 국제에서 “대한국은 황제국이며, 만세불변의 전제 정치”라 하여 황제국임을 자처하였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이 낡은‘제국’을 버리고,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민국’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나라의 주인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닌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선언한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임시정부는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은 상식이 된 것입니다. 이는 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을 외치며 일제와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임시정부, 국내와 어떻게 연결하였을까요?

중국 상하이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비록 일제에게 국토를 빼앗긴 상태였으나, 전국을 13도 12부 215군으로 나누고 서울에는 13도 총감 부를, 각 도에는 감독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도 하고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교재 위임장과 상해 격발 (국가등록문화재 제774-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교재 위임장과 상해 격발 (국가등록문화재 제774-1호)
임시정부가 이교재 선생을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위임장(좌)과 상해격발문(우)’으로 두 개의 문건이지만 이들을 이어놓고 가운데에 임시정부의 국쇄를 찍었습니다. 이 자료는 최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어떤 가치가 있는 내용이 담겨 있는 자료일까요?

연통제는 국내 각 지역에 설치된 비밀 행정 조직으로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독립운동 자금 조달, 정보 보고 등을 맡았고, 교통국은 정보 수집 및 분석과 연락을 담당하였습니다. 국내외에서 독립 공채를 발행하거나 의연금을 거두어 모은 자금을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전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경남 의령 출신의 안희제 선생이었습니다. 안희제 선생은 1909년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북간도와 시베리아의 독립군 기지를 돌아보며 독립운동의 뜻을 더욱 다졌습니다. 3년 후에 귀국하여 의령에 있던 재산을 정리한 선생은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열었습니다. 백산 상회는 무역 회사로 운영되었으나 실제로는 국내외 독립단체의 연락 사무소 역할을 하였습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내뿐 아니라 중국 심양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여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는 비밀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33년에는 발해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중국 화룡현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은 1942년 11월 선생을 체포·구금 하고 말았습니다. 9개월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안타깝게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한편,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연통제와 교통국은 1921년 일제 경찰의 감시로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연통제와 교통 국의 활동이 막히면서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강해지는 일제의 탄압과 독립운동 방법을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위기를 맞은 임시정부는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도 지지부진한 침체 상태를 면치 못했던 임시정부는 힘을 회복하기 위해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국내와의 연결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화 ‘밀정’ (2016)

영화 ‘밀정’ (2016)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살아간 독립운동가, 친일파, 밀정 등 복잡한 관계를 다룬 영화입니다.
특히 3 · 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 통치로 많은 사람들이 변절의 길을 택했던 당시 분위기를 긴장감있게 그려내고 있습 니다.

이 시기 임시정부가 국내와 꾸준히 연락하면서 조직과 자금을 확보하려한 구체적인 증거가 최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 보관 중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교재 위임장 및 상해 격발(檄發)’ 문서가 그것입니다.
이 문서는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교재 선생이 상하이의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비밀지령으로 독립운동 관련 중요사항에 대한 위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김구·조완구의 명의로 발부된 이 비밀지령은 이교재 선생이 군자금 모집이라는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때 휴대하였던 것입니다.
위임장은 이교재선생을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상주(常駐) 대표로 임명한다는 것이며,‘상해 격발’은 이중광을 국내와 일본의 특파원으로 임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특파원의 임무 및 임시정부의 사명을 국내외 동포에게 알리고 협조하라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이 자료는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 간의 연락과 조직 운영, 군자금확보의 내용 등을 담고 있어 1930년 전후 임시정부가 국내와 꾸준히 연락하면서 조직과 자금을 확보하고자 한 구체적인 증거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이처럼 각 지역에서 활동한 소중한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화제와 민주

공화제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정치체제입니다. 일반적으로 군주가 없는 국가 체제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Republic’이라 하는데, ‘공공의 것’을 뜻하는 라틴어의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나왔습니다. 로마 공화정을 끝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키케로는 이 표현을 ‘국민의 것’을 일컫는 ‘레스 포풀리(res populi)’로 풀이했습니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국민주권주의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역사적으로 공화제는 군주제에 대칭되며 군주제를 부정하는 개념으로 등장했습니다. 즉 권력의 독점에 반대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공화제와 민주 정치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원론적 의미에서 모든 공화국은 민주 정치의 공화제를 지향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 공화제 채택의 핵심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공화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원리가 지배하지만 공화제하에서도 독재정치나 귀족정치가 등장하는 경우를 역사에서 확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공화정과 민주주의의 과제는 소수의 권력 독점과 독재의 출현을 막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황제가 다스렸던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강제 합병된 상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새로운 근대 국민 국가로서의 민주공화국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대한독립’을 외치다‘대한독립’을 외치다
차별과 수탈에 맞서다차별과 수탈에 맞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