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철폐! 독재 타도!

유신 철폐! 독재 타도!

10월 유신 동상

10월 유신 동상
이 동상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아이세상 장난감 도서관 앞에 있습니다. 동상 아래에는 ‘10월 유신’이라고 쓰인 한자가 있습니다. 이 동상은 1972년 10월 유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유신?” 무슨말인가요?

1969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에 세 번이나 선출된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유신 체제를 선포하고 헌법 개정에 나섭니다. 이때 개정된 헌법을 ‘유신 헌법’이라고 합니다. 유신 헌법을 잠시 살펴볼까요?

유신헌법

제39조

  1.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없이 무기명투표로 선거한다.
  2.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 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 당선자로 한다.

제40조

  1.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 의원을 선거한다.
  2. 제1항의 국회의원의 후보자는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다.

제47조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제53조

  1.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외교·국방·경제· 재정·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2.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제59조 1.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

– 대한민국 헌법(1972. 12. 27.) –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중임을 제한하는 규정을 없애버림으로써 영구 집권도 가능해졌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2명 이상의 후보가 아닌 한 명의 후보자를 두고 찬성과 반대 의견을 투표로 묻는 방식으로 대통령 선거를 하였습 니다. 1972년 12월에 실시된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단독 후보였는데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 중에 99.77%가 찬성에 투표하였 습니다. 이로써 박정희는 4번 연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주었고 심지어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추천하도록 하여 의회마저 장악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삼권 분립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권한인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헌법 제8조에는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했으나, 제53조 2항에는 긴급조치권으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잠정적으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써 10월 유신 헌법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가장 반민주적인 헌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홍보하며 유신 체제를 정당화하려고 하였습니다.

유신 체제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신체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즉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신 헌법도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민주적인 헌법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긴급조치권은 1974년에 제1 호를 시작으로 1975년에 제9호까지 발표되었습니다.
유신 헌법에 등장하는 긴급조치권은 헌법 위의 법이 되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침해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긴급조치권을 이용하여 정권에 대한 비판을 막고자 기본권 중 하나인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하였습니다. “유신은 무슨 놈의 유신이야! 독재지!”라고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신체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즉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신 헌법도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민주적인 헌법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긴급조치권은 1974년에 제1 호를 시작으로 1975년에 제9호까지 발표되었습니다.
유신 헌법에 등장하는 긴급조치권은 헌법 위의 법이 되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침해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긴급조치권을 이용하여 정권에 대한 비판을 막고자 기본권 중 하나인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하였습니다. “유신은 무슨 놈의 유신이야! 독재지!”라고

유신헌법

장발 단속과 미니 스커트 단속_1
장발 단속과 미니 스커트 단속_2
장발 단속과 미니 스커트 단속_3

1970년대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들입니다. 경찰은 남성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여성의 치마 길이를 재었으며, 심지어 야간에는 0시가 되면 행인을 멈추어 세우고 야간 통행을 금지 하였습니다.

금지곡의 사연을 알아봅시다.

아침이슬 (양희은)

긴 밤 지새우고 /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 아침 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 나 이제 가노라

거짓말이야 (김추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 웃음도 거짓말
…(중략)…
그렇게도 잊었나 / 세월따라 잊었나
웃음속에 만나고 / 눈물속에 헤어져
다시 사랑 않으리 / 그대 잊으리
그대 나를 만나고 / 나를 버렸지
나를 버렸지
(이하생략)

이 노래에서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어 금지곡이 되었을까요?
국가적 상황과 국민적 기풍에 나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금지곡의 이유였습 니다. 양희은의 ‘아침 이슬’은 가사와 곡이 시기적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가사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을까요?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 제9호까지 내려 표현의 자유를 더욱 통제하였으나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계속 나왔습니다. 1976년에는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3·1 민주 구국 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1979.10.18 경남대학교 정문

1979.10.18 경남대학교 정문
1979년 10월 18일애 경남대학교 정문으로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이곳에 모였을까요?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집회, 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중략)… 유신 헌법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 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략)…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을 촉구한다.

– 3 · 1 민주 구국 선언문(1976) –

이처럼 억압과 통제가 난무하는 유신 체제하에서도 사람들은 민주 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편 1970년대 말 제2차 석유 파동, 중화학 공업의 중복 투자 등으로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국민의 삶도 점차 나빠졌습니다. 특히 마산은 한일합성 등 대규모 섬유공장을 비롯해 마산 수출 자유 무역 지역에 노동 집약 산업이 많아 노동자가 많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말부터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마산 지역의 많은 기업이 휴업과 폐업을 했고,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들은 해고되어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서울에서는 YH 무역이 부도가 나서 일자리를 잃은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하다 경찰에게 강제로 끌려 나간 ‘YH 무역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경제가 어려워지고 생활이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소수의 독재 정부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냐, 둘 중 하나를 미국 정부가 선택해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국회에서는 그를 의원직에서 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부산과 마산 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를 ‘부마민주항쟁’이라고 합니다. 이 항쟁은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에는 여러 개의 선언문이 만들어졌는데 당시 2학년이던 정광민 학생이 작성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략)…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 번 뜨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사는 젊은 지성인으로서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폐정개혁안>

1. 유신 헌법 철폐
2. 안정 성장 정책과 공평한 소득 분배
3. 학원 사찰 중지
4. 학도호국단 폐지
5. 언론·집회·결사의 완전한 자유와 보장
6. YH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7. 전 국민에 대한 정치 보복 금지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학우들과 강의실에 들어가 “여러분, 우리 이제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나가서 싸웁시다!”라고 외치니 많은 학생이 호응 하여 대학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교문을 나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부산 시내를 행진하였고 많은 시민이 이에 호응하였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훗날 재판정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부산에서)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이어 마산에서도 10월 18일에 경남대학교 정문 앞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 시위대는 정문에서 경찰 에게 막히자 “3·15 의거탑으로 모이자!”라고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습 니다. 이후 마산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10월 18일 밤에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유치준씨는 마산 산호동 일대의 시위 현장에 있다가 경찰과 군인의 강경 진압으로 머리를 크게 다쳐 다음날 새벽에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의 죽음을 가족에게 바로 알리지 않고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40년이 지나서야 항쟁의 첫 사망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할 만큼 군대와 경찰이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했음에도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민주항쟁의 대책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
이처럼 박정희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으로 국민의 요구를 겸허히 수용하고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희생이 발생하더라도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강제 진압만을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정희는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10·26 사태) 18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하던 박정희의 죽음은 그가 만든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였습니다. 비로소 국민은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1980. 5. 19 광주 금남로

1980. 5. 19 광주 금남로
1980년 5월 19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과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을 ‘신군부’ 라고 합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인 및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을 체포하였으며, 대학에는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신군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힘으로 눌렸습니다.
한편 신군부의 강경 정책에도 광주시민들은 민주화 운동을 계속하였 습니다.(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신군부의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자 신군부는 계엄군을 파견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광주 시민 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대 규모가 점차 커지자 5월 21일에 계엄 군은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수백 명의 시민과 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총을 쏘는 계엄군에 맞서기 위해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무기를 확보해 시민군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5월 22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전남도청을 장악하였 습니다.

시민 여러분!
너무나 경악스러운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 당국은 발포 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 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 광주 시민군 궐기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1980.5.25.) –

이후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였습니다. 한편 더 이상의 피를 흘릴 수는 없다며 광주 시민 대표들은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무시 하고 5월 27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전남도청을 장악하였습니다. 신군부는 국민과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의 총구를 광주의 학생과 시민에게 향하게 하여 많은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부마민주항쟁으로 시작된 유신 체제의 저항은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부마민주항쟁과 5·18 민주화운동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반영해 일어났다는 점과 군대라는 국가 권력이 무력으로 진압 했다는 점에서 많이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부마민주항쟁과 5·18 민주화운동은 군부 독재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저항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으며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0월 부마민주항쟁과 5월 광주는 이어져 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6월 민주항쟁,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6월 민주항쟁,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