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평등한 세상을 향한 외침

[인권] 평등한 세상을 향한 외침,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울려 퍼지다.

형평운동 기념탑

[형평운동 기념탑]
세상을 향해 평등을 외쳤던 형평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입니다. 원래 진주성 동문에 있었으나 복원 사업으로 현재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야외공연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진주는 조선 시대에 경상우도의 중심지이자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습니다.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진주에서는 기생과 걸인들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나라가 위기일 때마다 진주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1920년대 진주에서는 사회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차별받던 백정들이 세상을 향해 평등을 외친 ‘형평운동’이 대표적입니다. 불가촉천민, 즉 일반인과 접촉할 수 없는 천민으로 멸시받던 백정들은 저울추처럼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백정이 아닌 강상호, 신현수 등도 백정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곳 진주에서 세상의 진정한 평등이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진주에서 백정들이 진정 원했던 세상은 무엇인지 확인해 봅시다.

현장 체험 활동

세상을 향해 평등을 외친 ‘형평운동’의 현장인 진주를 방문해 봅시다.

현장 체험 순서

① 형평운동 기념탑 ② 진주 향교 ③ 진주 교회 ④ 진주 청년 회관 터 ⑤ 진주극장(구 진주좌) ⑥ 국립 진주 박물관 ⑦ 신현수 선생 송공비 ⑧ 강상호 선생 묘소

사진으로 만나는
현장 체험

형평운동 기념탑
① 형평운동 기념탑
진주 향교
② 진주 향교
진주 교회
③ 진주 교회
진주 청년회관 터
④ 진주 청년 회관 터
진주극장(구 진주좌)
⑤ 진주극장(구 진주좌)
국립 진주 박물관
⑥ 국립 진주 박물관
신현수 선생 송공비
⑦ 신현수 선생 송공비
강상호 선생 묘소
⑧ 강상호 선생 묘소

현장 체험 활동 후 느낀 점을 적어 보세요.

형평운동 기념탑

경남 진주시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 478-5(구 본성동 10-6)

형평운동 기념탑

“인간 존엄 인간 사랑, 자유 평등 형평 정신”
“형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위 내용은 형평운동 기념탑에 새겨진 문구로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 이들이 힘을 모아 수천 년에 걸친 신분 차별을 없애고자 한 운동을 기리고자 이 기념탑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기념탑을 만든 작가는 “가진 자도, 못가진 자도,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그녀도, 그이도 모두 이 평등의 문을 나서라”고 작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주 향교 아래 도수장(도축장) 터

경남 진주시 향교로 99-3(옥봉동 232-1)

진주 향교 아래 도수장(도축장) 터

진주 향교는 고려 시대에 세워져 조선 태종 대에 문묘가 세워져 향교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갑오개혁으로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았습니다. 향교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고기를 백정에게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향교 옆에는 백정들이 사는 마을로 가축을 잡는 도수장(도축장)이 들어섰습니다. 즉 양반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던 향교와 고기를 바치는 백정의 마을은 한곳에 있었습니다.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백정들이라 남자는 상투를, 여자는 비녀를 꽂을 수 없었고 죽어서도 꽃상여를 탈 수 없었습니다.

진주 교회

경남 진주시 의병로 250번길 16(봉래동 37)

진주 교회

1905년에 진주 지역 최초의 교회인 옥봉리 교회(현 진주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커렐 목사는 옥봉리 교회 이외에도 백정들을 위한 예배당을 따로 두어 운영하였습니다. 1908년 새로 부임한 라이올 목사가 이듬해에 백정들과 일반 신자들을 함께 예배하게 하자 일반 신자들이 집단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는 폐지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차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백정 들은 다른 학부모들의 반대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진주 청년회관 터

경남 진주시 진주대로 1107번길 8-1(계동 65)

진주 청년회관 터

1923년 4월 25일 당시 진주 청년회관에서 형평사가 창설되었습니다. 양반 출신인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지식인 들과 백정 출신인 이학찬, 장지필 등이 연대한 결과였습니다.
특히 백정 출신인 이학찬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으나 아들이 학부모와 학교의 반대로 입학이 거부되었습니다. 이에 이학찬은 진주의 여러 백정 마을을 돌며 설득하여 형평사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백정의 아들인 장지필은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취업을 포기하고 형평운동에 가담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진주극장(구 진주좌)

경남 진주시 진주대로 1057(대안동 13-13)

진주극장(구 진주좌)

1923년 5월 13일 당시 진주에서 제일 큰 건물인 진주좌에서 조선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렸습니다. 전국의 백정 지도자 100여 명과 회원 500여 명이 참석하였고, 형평사를 선전하는 종이도 7천여 장이 배포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형평사는 창립 1년 만에 조직이 12개 지사, 67개 분회로 늘어났고, 5년 뒤에 회원 수가 9,600여 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세력이 급성장하였습니다. 12년간 진행된 형평운동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알리는 사회 운동이었습니다.

국립 진주 박물관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35 (남성동 169-17)

국립 진주 박물관

1984년에 개관한 국립 진주 박물관은 가야 문화를 소개하는 박물관이었으나 1998년부터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진주성 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진주 박물관에는 임진왜란 관련 유물 이에도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 농민항쟁, 형평운동 등의 유물도 함께 전시되고 있습 니다. 박물관에는 형평운동과 관련된 형평운동 홍보 포스터, 형평사 기관지였던 ‘정진’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현재 진주에서 형평운동 관련 전시물을 볼 수 있는 공간입 니다.

신현수 공덕비

경남 진주시 망경동(망진산 봉수대 앞 주차장)

신현수 공덕비

신현수(1893~1961)는 조선일보 진주 지국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다양한 사회 운동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강상호를 만나 논의하던 중 백정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1923년 1월 진주 청년회를 조직 하였고 4월에는 조선 형평사 창립에 참여하여 형평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신현수는 형평사라는 조직 이름을 제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우리는 수평보다 한층 의미깊은, 저울같이 공정하고 평등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형평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조선 형평사라는 명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강상호 선생 묘소

경남 진주시 가좌동

강상호 선생 묘소

강상호(1882~1957)는 1919년에 진주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29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봉양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설립하였고 동아일보 초대 지국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23년 조선 형평사 창립에 참여하여 백정 들을 위해 교육에 힘쓰면서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형평장’이란 이름으로 치러졌습니다. 장례식 때 상여 뒤로는 만장(輓章)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5년에 애국지사로 추서되었습니다

형평운동 포스터(왼쪽)와 조선 형평사 취지서(아래)

 

형평운동 포스터(왼쪽)와 조선 형평사 취지서(아래)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고 자 함이 본사의 주지니라. 지금까지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압박을 받아 왔는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 통곡하고도 피눈물을 금할 수 없다. ⋯ ⋯ 천하고 가난하고 연약해서 비천하게 굴종하였던 자는 누구 였는가? 아아, 그것은 우리 백정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비극에 대한 사회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소위 지식 계층에 의한 압박과 멸시만이 있지 않았던가? ⋯ ⋯
조선 형평사 창립 취지서, 조선일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외침, 진주 농민항쟁과 3·1 만세 운동

진주 농민항쟁 기념탑

진주 농민항쟁 기념탑(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349-4)

이곳은 진주 농민항쟁을 모의한 수곡장터인 무실 장이 열렸던 곳으로 2012년에 진주 농민항쟁 기념탑이 건립되었습니다. 농민항쟁의 시작은 덕산 장터지만 사전 모의가 이루어진 곳은 무실 장터로 이곳에서 몰락 양반인 류계춘이 중심이 되어 항쟁의 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관리들의 비리와 혹독한 세금 부과에 참지 못한 농민들은 1862년 2월 14일 덕산터에 모여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진주성으로 쳐들어가자 진주목사 홍병원과 경상우병사 백낙신은 농민들의 위세에 눌려 요구사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안핵사 박규수가 내려와 사태를 수습하였습니다.
이후 진주 농민항쟁은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정부는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하고자 삼정이청정을 설치하였습니다.

진주 3·1운동 기념비

진주 3·1운동 기념비(진주성 내 위치)

1919년 3월 18일 12시 진주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대규모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진주 중앙시장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경남도청 앞 영남 포정사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대에 잉크물을 던져 검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합니다. 시위는 21일까지 이어졌고 시위와 함께 상가 철시도 진행되었습니다.
진주 지역 만세 운동에는 기생과 걸인들까지 단체로 참여할 정도로 민족운동에는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편,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주 공립 고등 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 일신 여자 보통 고등학교(현 진주여자고등학교), 도립 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학교), 진주 공립 농림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 등 진주 지역 학생들도 학생 항일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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