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세웠으나 남과 북에 따로 만들어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정부는 세웠으나 남과 북에 따로 만들어지다
Democrati
정부는 세웠으나 남과 북에 따로 만들어지다
두근두근! 우리의 첫 민주 선거는 어땠나요?
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직접 민주 주의와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이 국가 의사를 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선거는 투표를 통하여 공직자나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즉, 주권자인 국민이 자신을 대신하여 국가를 운영할 대표자를 선출하는 대의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났습 니다.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이날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선거는 우리의 기대하고 바라던 선거와는 다르게 진행 되어 갔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인구비례에 따라 선거구를 나누어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의 총선거를 결정하였습니다. 유엔은 총 선거를 위하여 유엔 한국감시위원단을 보냈으나 38도선 이북으로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유엔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북한과 소련이 이들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듬해 2월 유엔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38도선 이남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하였습 니다.
남북을 아우르는 총선거가 아닌 38도선 이남 지역만의 선거 결정은 사람들에게 분단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점차 현실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에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김규식과 함께 38도선을 넘어가 남북 협상을 하였습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제주도민이 봉기하였습니다. 이를 ‘제주 4·3 사건’이라 하는데 군인과 경찰의 무자비한 토벌 작전으로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희생자 중에 1/3이 어린이, 여성, 그리고 노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선거는 5월 10일에 그대로 실시되었습니다. 5·10 총선거는 선거의 4대 원칙인 보통 선거, 평등 선거, 직접 선거, 비밀 선거로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선거의 원칙에 따라 여성도 투표에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거는 다른 선거와 다른 특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조선화보 25호’를 보면‘등록’ 글자 아래에 ‘총선거에 투표하시려면 등록소에 가서 이용자에 당신의 이름을 등록하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만 18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1948년 5·10 총선거에서는 유권자 등록을 해야만 선거에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경남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권자 등록을 했을까요? 다음은 당시의 사실을 다루고 있는 신문 기사의 내용입니다.
경상남도선거위원회 발표에 의하면 도내 인구는 남자 1,603,879명, 여자 1,597,935명 합계 3,201,401명인데 이 중에 유권자는 남자 655,430명, 여자 657,935명 합계 1,313,365명으로서 인구수 대한 비율은 41%이고 등록인 수는 남자 640,049명, 여자 646,508명 합계 1,286,557명으로서 유권자 수에 대한 비율은 97.9%이다. 투표구 수는 1,813개소이고 국회의원 입후보자 수는 147명 이라고 한다.
– 남선신문(현 경남신문) 1948.4.28. –
자료를 보면 경남에서 총선거에 등록한 유권자는 97.9%였고, 등록한 유권자의 96%가 투표에 참여하였습니다. 가장 많이 등록하였던 강원도(98%) 다음으로 높은 투표율이자 전국 평균인 93%보다도 높았습니다. 경남 지역의 5·10 총선거에 대한 기대와 열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5·10 총선거에서는 원래 300명의 의원을 선출하려고 하였으나 38 도선 이북 지역의 100석과 ‘제주 4·3 사건’으로 투표가 진행되지 못한 제주도 2개 선거구를 제외한 198명만을 선출하였습니다. 이때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일부 우파 세력과 좌파 세력들은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당시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선거에 대한 열의는 가득하였 으나 첫 번째 민주주의의 꽃은 완전하게 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모두가 참여하지 못한 정부 수립이라는 아쉬움이 가득한 선거였습니다.
제헌 국회 의석 비율
5·10 총선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의 정당 소속을 보면 무소속이 85명(42.5%)이나 되었습니다. 정당별로 보면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27.5%), 한국민주당 29명(14.5%),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12명(6%) 순이었고, 기타 17명이었습니다. 한국 민주당이 29명밖에 당선자를 못 낸 것을 보면 당시의 민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김구 계열의 한국독립당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아 대거 무소속에 출마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분석됩니다. 그 외 무소속은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당선되는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경남에서 선출하는 국회의원은 총 31명이었는데 이 중에 무소속이 17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경남의 선거 양상도 전국적인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왜 일어났나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무장 봉기 및 1954년 9월 21 일까지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미군정 시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 –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행사에서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다치자 시민 들이 경찰에게 항의하였습니다. 경찰은 항의하는 제주도민에게 총을 쏘았고, 주민들은 총파업으로 맞섰습니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빨갱이 섬)’으로 지목하고, 경찰과 극우 청년들을 동원하여 제압하였습니다. 한때 평화적인 해결의 기미가 보였으나, 미군 정이 무력에 의한 강경 진압 작전을 선택하면서 제주도민을 탄압하였습니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4월 3일에 제주도의 사회주의 세력과 일부 주민들이 봉기하였습니다. 이후 양쪽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 반복되었는데, 1948년 10월부터 시작된 군인과 경찰의 대토벌 작전으로 중산간 지대의 민간인 마을 대부분이 불타 버리고, 많은 주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130여 마을이 사라지고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되었습니다.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은 자는 반동이라고 대나무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함덕리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도피자를 검속을 하니, 결국 마을 남정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순경들이 도피자라고 찾던 폐병쟁이 종철이 형은 공비가 습격해 온 밤에 궤 뒤에 숨어 있다가 기침을 몹시 하는 바람에 발각되어 대나무창에 찔러 죽었고 헛간 멍석 세워 둔 틈에 숨어 있다가 역시 공비의 대창 맞고 죽은 완식이 아버지도 순경들이 찾던 도피자였다.
– 현기영, 「순이 삼촌」 일부 –
정부의 제주 4·3 사건 진상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는 25,000 ~35,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당시 제주의 인구가 28만여 명임을 본다면 상당한 희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하였고, 제주도 사람들에게 사과하였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 선포하였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거대한 국가 권력에 의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던 사건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제주도 사람들은 인권과 평화를 온전히 지킬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는 평화의 섬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헌법에는 무엇을 담았나요?
5·10 총선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나라의 이름을 정하고, 국민과 국가와의 관계 및 국가의 조직과 권한을 정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법을 ‘헌법’이라고 합니다. 당시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릅니다.이는 이 국회에서 헌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 기관을 조직하거나 구성하고 기관의 상호 관계와 활동 범위를 규정하여 국가 기관이 헌법에 주어진 권한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는 규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정부를 민주적으로 원활하게 운영하며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헌법을 잘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고 먼저 헌법 초안에 넣을 나라 이름과 정부 형태를 논의하였습니다. 국호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민국’이라는 용어는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민국 앞에 넣을 국호로는 대한, 한국, 고려, 조선 등 다양하게 제안되었고, 여러 논의 끝에 ‘대한민국’으로 정하였습니다. 정부 형태는 내각 책임제와 대통령 중심제를 두고 의견이 대립하였으나 이승만의 강력한 요구로 대통령 중심 제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만들어진 첫 번째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습니다. 그래서 7월 17일은 제헌절이라는 국가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제헌 헌법의 전문을 살펴볼까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 함에 있어서 ⋯ (중략) ⋯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 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 (중략) ⋯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전문 –
헌법 전문에 나와 있는‘우리들 대한국민’은 이 나라의 주체가 국민 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국호인‘대한’은 3·1 운동으로 서울에 세워진 한성정부와 이를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국’은 이 나라가 왕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나라라는 점을 명확히 하여 헌법에 반영한 것입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5조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 하는 의무를 진다.
제8조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할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일체 인정되지 아니하며 여하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하지 못한다.
– 대한민국 제헌 헌법(1948. 7. 12.) –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하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2조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므로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입 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헌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나 제1조와 제2조의 내용은 제헌 헌법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헌법에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당연한 책무가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 헌법 전문에 밝힌 것처럼 국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균등한 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또 헌법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차별받지 않을 평등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즉 헌법을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국가는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또한 권력의 집중에 의한 폐단을 막고 민주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삼권분립의 원칙을 내세워 견제를 통한 권력의 균형을 추구하였습니다. 국가의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쳐 독재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한편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이 꾸준히 제기해 왔던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관한 내용도 헌법에 담았습니다.
제101조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 제헌 헌법(1948.7.12.) –
이를 근거로 1948년 10월에‘반민족 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법(반민법)’을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반민법에 따라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으나 국민이 원하는 반민족 행위자인 친일파의 청산은 이승만 정권의 소극적 태도와 이에 편승한 친일 세력의 반발로 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헌법의 권위로 친일 세력을 처벌하고자 하였던 우리 민족의 열망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고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제헌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그해 12월 12일 UN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UN 감시 아래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