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을 외치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싹튼
민주, 인권, 평화
‘대한독립’을 외치다
hope
‘대한독립’을 외치다
그들은 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까요?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일제는 식민지가 된 한반도를 조선이라 부르며 최고 권력자로 총독을 파견하였습니다. 총독은 일본군인 출신으로 임명되었는데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권, 사법권을 가지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헌병 경찰을 앞세워 한국인을 강압적으로 무단 통치하였습니다. 현역 군인인 헌병 사령관을 경찰 최고 책임자인 경무 총감으로 임명하고, 각 지역에는 헌병 분대와 파출소, 주재소 등을 두어 한국인을 감시, 억압하였 습니다. 헌병 경찰은 조선인에 대한 즉결 처분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태형 등의 형벌로 가혹하게 사람들을 대하였습니다. 아이들 울음을 그치게 하는 말로 ‘일본 순사 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순사는 일본 경찰을 가리키는데, 당시 일본 경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일제는 언론 활동이나 출판, 각종 단체 활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으며, 각종 단체를 해산시키고 집회․결사의 자유까지 빼앗아 버렸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에게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여 학생들을 어려서 부터 일제의 억압에 순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1919년 우리 민족은 이러한 억압과 착취의 고통에 거대한 만세운동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순식 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경남 지역에서는 3월 3일 마산에 독립 선언서가 전해지면서 시위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었습니다. 3월 9일 함안의 연개장터, 3월 13일 창녕과 밀양, 14일 통영, 의령 등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앞에서 본 뮤지컬 ‘꽃비 내리는 날’은 통영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정홍도(본명 정막래)와 이국희(본명 이소선)의 이야기를 극에 담았습니다. 당시 스무살 남짓의 꽃다운 여인이었던 그들은 기생단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금반지와 금비녀를 팔아 시위를 준비하였습니다. 1919년 4월 2일, 그녀들은 수천 명의 통영 사람들의 선두에 서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고, 치안을 방해했다는 죄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외친 ‘독립만세’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3·1운동 당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기록이 있습니다. 1919년 3월 18일 하동군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를 비롯한 12명의 하동 지역 사람들이 쓴 독립선언서입니다. 박치화 선생이 살던 옛집 천장 속에 숨겨져 있던 이 자료는 뒤늦게 1986년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만들어진 기미독립선언서와는 별개로 지역에서 작성된 독립선언서로 3·1운동의 정신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자료입니다.
3·1운동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는 사표를 제출하고, 하동 지역 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계획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만들어진 기미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어려웠던 그는 스스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뜻있는 지역 사람들이 서명하여 호응하였습니다. 어려운 옛 문체로 쓰인 글이지만 3·1운동의 정신을 보여주는 소중한 선언문입니다. 여러분! 당시 박치화 선생의 마음으로 천천히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를 읽어 보면 어떨까요?
서울과 하동의 독립선언서에는 모두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열린 파리평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가 독립 요구의 중요한 계기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독립 의지와 평화운동의 정신 역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양 친목과 세계 평화’라는 표현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목놓아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또 다른 큰 뜻을 생각 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3·1운동은 독립만세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외적 으로는 반일 독립 운동이었지만,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자유와 정의, 평등과 평화를 지향한 민주주의 운동이었으며,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넘어 독립된 나라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였습니다. 이 땅의 주인이 제국주의 일본도, 과거의 전제군주도 아닌 우리 국민인 민주주의 국가를 천명한 것입니다.
경남의 3・1운동
경남 지역의 3·1운동은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며 시작되었습 니다. 3월 9일 함안의 연개장터 시위를 시작으로 3월 13일 동래·창녕·밀양, 3월 14일 통영·의령·창녕, 3월 18일 합천·진주·하동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시위는 4월 초 절정에 달하였으나 4월 중순 이후 일제의 탄압 강도가 강해져 4월 말경에 사실상 종결 되었습니다. 일제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남은 전국에서 경기도(16만 9,300명) 다음으로 많은 10만 8,9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경남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학생층과 종교계 및 양반 유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저항의 주체는 농민, 어민, 상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경남에서는 농어민의 저항이 강하였습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경남 지역은 일본의 수탈이 집중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원의 무라이농장·하자마농장·사사키농장, 밀양의 마쓰시타농장, 함안의 남해회사, 창녕의 카와사키농장 등 수많은 일본인 지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비롯한 일제의 극심한 수탈은 농어민들의 강렬한 저항의 원인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