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
경남의 민주·인권·평화,
어디까지 가 봤니?
[민주]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
마산에서 시작되다.
경남의 민주·인권·평화, 어디까지 가 봤니?
[민주]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벌이자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선거 무효를 외쳤습니다. 경찰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한 학생의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이 학생은 3월 15일에 실종된 김주열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다시 한번 시위를 벌였고 이 일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 혁명의 첫 시작점인 마산 3·15 의거의 역사적 현장을 돌아보면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를 확인해 봅시다.
현장 체험 활동
4·19 혁명의 시작인 마산 3·15 의거 현장을 직접 거닐어 봅시다.
현장 체험 순서
① 3·15 의거 발원지(구 민주당 마산시당) → ② 마산 창동 거리 → ③ 3·15 의거 기념탑 → ④ 무학초등학교 총탄 흔적 담장 → ⑤ 김주열의 시신이 인양된 부두 → ⑥ 김주열 시신이 안치된 곳(마산의료원) → ⑦ 옛 마산시청(마산합포구청) → ⑧ 국립 3·15 민주 묘지
사진으로 만나는
현장 체험
현장 체험 활동 후 느낀 점을 적어 보세요.
3·15 의거 발원지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화의 길 방면(오동동 164-2 주변)
1960년 3월 15일 마산 장군동 투표소에서 미리 투표 용지를 넣어 둔 투표함이 발각되었습니다. 9시에는 선거 번호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민주당 마산시당 사무실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에 민주당 간부들이 당사 주변에서 부정선거 무효 선언을 외쳤고 이 소식을 들은 마산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위 규모는 점차 커졌습니다.
3월 15일 오후 2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에 모인 600 여 명의 시위대는 불종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시위대는 마산시청 개표장으로 모일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마산 창동 거리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거리길 방면(창동 120-2 주변)
오후 6시 30분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창동 거리에 있는 남성동 파출소 앞에 재집결하였고 일부는 마산시청과 북마산 파출소로 분산하여 진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산 시내 곳곳을 돌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오후 8시 10분 마산시청 앞, 남성동 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앞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고 총을 쏘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지거나 다치는 이도 있었습니다. 한편 시위 도중에 실종된 이도 있었는데 이 중에는 김주열 학생도 있었습니다.
3·15 의거 기념탑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 76-46
3·15 의거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탑으로 1962년에 세워 졌습니다. 이곳은 시민과 학생들이 마산시청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피해가 컸던 장소였습니다.
기념탑 아래에는 이광석 시인이 쓴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저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의 깃발을 올리던 그 날 1960년 3월 15일 더러는 독재의 총알에 꽃이슬이 되고 ⋯ (중략) ⋯ 보라 우리 모두 손잡고 외치던 거리에 우뚝 솟은 마산의 얼을, 이 고장 3월에 빗발친 자유와 민권의 존엄이 여기 영글었노라.”
무학초등학교 총탄 흔적 담장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8길 6(자산동 119-9)
3·15 의거 당일 경찰이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던 곳 입니다. 3월 15일 밤, 시내 곳곳에서 시위하던 시민과 학생 들이 무학초등학교 앞 도로에 집결해 옛 마산시청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은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실탄 사격을 가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공포탄을 쏘았다고 하나 총탄 흔적을 보아 실탄 사격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총탄 자국이 뚜렷이 남은 학교 담장은 허물어졌으며 2014년 원래 위치에서 약간 옆으로 옮겨 담장을 복원하였습니다.
김주열의 시신이 인양된 부두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 1가 47-6번지 일원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 중앙 부두에 한 시신이 인양되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밤에 실종된 김주열 학생 이었습니다. 김주열은 전북 남원 출신으로 마산 상업 고등학교(현 용마고등학교) 합격 발표를 확인하려고 형과 마산에 와 있던 중 3·15 의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고 경찰은 이를 은폐하고자 시신을 돌멩이에 매달아 바다에 던졌습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김주열의 실종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직접 마산으로 와서 아들을 한동안 찾아 헤맸습니다.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곳(마산의료원)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31(장군동4가 3-6)
마산 앞바다에서 인양된 김주열의 시신은 도립 마산병원 으로 옮겨져 바로 검시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도립 마산병원 앞으로 모였습니다.
오후 5시 김주열의 시신을 확인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제 2차 마산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시위대는 건너편 마산시청 으로 향해 나아가자, 이에 경찰이 총을 쏘았습니다. 이 과정 에서 김영길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다쳤습니다.
옛 마산시청(마산합포구청)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10(중앙동3가 4-11)
3월 15일 저녁부터 마산시청에서 부정선거 개표가 이루어 진다는 소식에 시민과 학생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에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4월 11일에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 마산병원에 다시 모인 사람들은 마산시청의 유리창과 기물 등을 부수기도 하였고 마산경찰서로 진출하여 경찰서장의 지프 차량을 불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제2차 마산 의거는 4월 13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이후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4·19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립 3·15 민주묘지
→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성역로 75(구암동 541)
국립 3·15 민주 묘지는 3월 15일과 4월 11일에서 13일까지 일어난 마산 3·15 의거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곳입니다. 1968년 마산 구암동 애기봉 산자락에 3·15의거 희생자 묘역이 처음 조성되었습니다. 2002년 8월에 정부는 국립 3·15 묘지로 승격하였습니다. 유영 봉안소에는 3·15 의거 당시 희생자들의 영정이 있고, 묘역에는 43기의 희생자 유해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3·15 의거는 2003년에 경상남도기념일로 지정되었고, 2010년에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었습니다.
3·15 의거에서 희생된 12명
- 강융기(당시 20세) 마산공고 2학년 재학. 3월 15일 밤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총상 입고 사망.
- 김상웅(당시 19세) 창신중학교 졸업. 3월 15일 밤 북마산 파출소 앞에서 총상 입고 사망.
- 김영길(당시 18세) 창신중학교 졸업. 향도철공소 근무. 4월 11일 제2차 의거 때 총상 입고 사망.
- 김영준(당시 20세) 마산고등학교 졸업. 3월 15일 밤 마산시청 부근에서 총상 입고 사망.
- 김영호(당시 19세) 마산공고 야간부 2학년 재학. 3월 15일 마산시청 부근에서 총상 입고 사망.
- 김용실(당시 18세) 마산고등학교 1학년 재학. 3월 15일 북마산 파출소 앞에서 총상 입고 사망.
- 김종술(당 17세) 마산동중학교에 재학. 4월 26일 부산에서 온 원정대와 함께 시위하다가 사망.
- 김주열(당시 17세) 마산상업고등학교 합격. 3월 15일 밤 마산시청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사망.
- 김평도(당시 39세) 부림시장 메리야스 판매상. 4월 26일 시위 중 부상을 입고 사망.
- 김효덕(당시 19세) 마산 마포중학교 졸업. 공장 직공 근무. 3월 15일 밤 마산시청 부근 사망.
- 오성원(당시 20세) 국민학교 졸업 후 잡화행상. 3월 15일 밤 시민극장 부근에서 총상 사망.
- 전의규(당시 18세) 창신중학교 졸업. 3월 15일 밤 북마산 파출소 부근에서 총상 사망.
마산에서 만나는 독립운동 이야기 – 마산 삼진의거, 그리고 경행재
8의사 창의탑은 1919년 4월 3일 마산의 진동·진북·진전면의 삼진 주민들이 일으킨 삼진의거 과정에서 희생된 8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삼진의거는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 모인 시위대가 진동면 방향으로 향하자 진전면 오서리 주민들이 합세 하였고, 진북면의 주민이 호응하며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진동 장날에 나온 주민들도 가세하면서 시위 규모는 8,000여 명(일본 경찰 추산 1,500명)이 될 정도로 매우 커졌습니다.
일본 경찰은 마산 일본 헌병대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사동 다리에서 시위대를 막았습니다.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를 이끌던 김수동이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자, 그를 대신해 태극기를 흔들던 변갑섭은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맞아 팔이 잘리는 등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8명이 숨지고 수십여 명이 다쳤습니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지역 주민들이 당시 순국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고자 사동교 건너 암벽에 창의비를 처음 세웠습니다. 1963년 10월에 현재 위치에 창의탑이 건립되었고 2013년에 지금의 탑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은 당시 순국한 8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경행재는 원래 안동 권씨 사당으로 문중의 재실 및 한학(漢學)을 가르치던 곳 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사립 경행 학교의 건물로 사용되어 이 지역의 신식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권영조 등은 이 건물에서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였고, 4월 3일 삼진 의거가 일어나자 이곳 주민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하였습니다. 1927년 일제가 공립 보통학교(오늘날 진전초등학교)를 세우면서 경행 학교는 폐교되었습니다.
폐교 이후에는 지역 행사나 강습장, 회의장 등 지역의 문화시설로 이용되었습니다. 경행 학교가 배출한 인물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한 이교재와 삼진의거를 준비하고 주도한 권영조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