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6월 민주항쟁,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
against
6월 민주항쟁,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
시민들은 왜 헌법을 바꾸자고 하였을까요?
박정희 후보 9대 대통령 당선.
2,578명 참석
2,577표 획득. 무효1표.
1978년 실시한 제9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입니다. 당선된 후보는 박정희. 어떻게 99.9% 라는 득표율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1972년 10월에 선포한 유신 헌법은 국민이 가지고 있었던 대통령 선거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단체에서 대통1972년 10월에 선포한 유신 헌법은 국민이 가지고 있었던 대통령 선거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단체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모두 한 명의 후보자가 나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죠. 서울의 장충체육관 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기 때문에 이 선거를 체육관 선거라고 부르 기도 했습니다. 국민의 불만은 점점 커졌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게 되었습니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대통령도 체육관 선거로 당선되었 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 내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는 끊이지 않았고 정부는 이를 탄압하였습니다. 특히 1986년에는 야당과 학생들이 헌법을 바꾸자는 개헌운동을 벌입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는 이런 요구를 무시하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고, 핵심 인물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고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3학년 박종철은 자신의 자취방에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붙들려 어디론가로 끌려갑니다. 그곳은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심문하는 서울 남영동에 있는 대공분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박종철은 민주화 운동을 하는 선배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면서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려가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고문이 계속 이어졌고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박종철의 사망 소식이 세상에 전해지자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사망 하였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런 경찰의 발표는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경찰은 얼마 후에 물고문이 있었 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발표도 진실된 발표가 아니었 습니다. 경찰관 2명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조작된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말로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였습니다. 시민들의 분노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로 인해 쌓여왔던 불만을 폭발시키게 됩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자는 요구와 함께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경남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나요?
박종철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경남에서도 경상대, 경남대 등 대학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경남의 여러 민주화운동단체의 주최로 열린 박종철 군 추도의 날에는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역 광장에 모여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마산, 진주, 거창 등 경남 곳곳에서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진상 요구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전국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박종철 추모, 직선제 개헌 요구,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는 19 87년 4월 13일,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존의 헌법을 고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이 조치로 인해 시위가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던 정부의 기대와 달리 시위는 더욱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호헌 철폐는 4·13 호헌조치를 철폐하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구호를 외치는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왔고 경남에서도 대학가를 중심으로 거센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2학년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집니다. 곧바로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혼수 상태에빠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불난 집에기름을 부은 것처럼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게 되었고 6월 10일 전국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제는 대학생뿐 아니라 넥타 이를 맨 회사원들까지 시위에 합류하였고, 거리를 지나가는 차들은 경적을 울려 대며 시위를 지지하는 신호를 보내는 등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외침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날 마산종합운동장에서는 한국 대표팀과 이집트 대표팀간의 축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경기장 주변에서 시위가 벌어져 경찰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자 이집트 선수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였 습니다. 이 사이 한국팀이 골을 넣었지만 주심은 경기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경기장에 있던 3만여 명의 관중들은 술렁이며 환불을 요구했고 흥분한 관중들은 경기장 안팎으로 쏟아져 나갔습니다. 경기장 밖으로 나간 관중들은 시위대와 합류하여 마산 시내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안간힘을 다해 시위를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오히려 시위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과격해지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군사 독재로 인해 억눌려 왔던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드디어 폭발한 것입니다. 결국 정부는 시민들에게 항복했습니다. 6월 29일, 여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 선언’을 하게 됩니다.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주의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 개헌.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게 되었고, 임기 5년으로 2번 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습니다. 1972년 유신 헌법으로 빼앗겼던 대통령 선거권을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은 것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헌법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대통령 직선제는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 그리고 경찰의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로 나왔던 수많은 시민의 노력으로 쟁취한 결과입니다.
1987년 6월의 경남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는 경남 전역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산에서는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시민들이 시위대와 합류하여 수천 명이 시낸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후에도 경남대, 창원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진주에서는 경상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진주시청 앞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를 외쳤습니다. 특히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LPG 운반 트럭 2대를 잡아두고 고속도로를 막아가며 시위를 한 사건은 전국 언론에 머리기사로 보도되는 등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진해에서는 수백 명의 시민이 장복 예식장 앞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였고 거창에서는 농민들이 중심이 된 100여 명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평화 대행 진을 하였습니다. 김해에서는 인제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고성과 함양에서도 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져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처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외침은 경남 곳곳에서 계속되었고, 결국 시민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