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으로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6·25 전쟁으로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다
Democrati
6·25 전쟁으로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다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나라는 안정이 되었나요?
1948년 8월 15일 38도선 이남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인 9월 9일에 38도선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1948년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국회의원 100석을 비워둔 상태였고, 북한도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제각기 정통성이 있는 정부임을 내세웠습니다. 남한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북한은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다른 체제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헌법에는 유사한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두 나라로 갈라섰고 서로가 이 땅을 대표하는 정부라는 주장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정세는 불안한 남북 관계의 긴장을 만들 었고, 이 땅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북한은 미국과 친일파의 지배를 받는 남한을 해방한다면서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 남한을 침략할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반면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사회주의 세력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사회를 혼란하게 한다며 반공 정책을 내세워 탄압하고, 북진 통일을 외치며 미국에 무기와 물자지원을 요구하였습니다.
남과 북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와 타협을 거쳐 힘을 모아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노력도 없이 체제 경쟁과 함께 전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고 통일하겠다는 의지만을 보였습니다. 광복과 동시에 남과 북을 가르는 선으로 그어졌던 38도선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불안한 평화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은 사람들의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였나요?
전쟁이란 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 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은 평화를 사라지게 하고 공포와 불안만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전쟁은 국가 간의 싸움으로만 볼 수 있으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개개인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전쟁 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기습적인 공격을 시작으로 남침을 감행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어떤 이는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나갔고, 다른 이들은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전쟁을 피하여 끝 모를 피난 길로 떠나갔습니다. 모두의 편안한 삶을 전쟁이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생존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군인은 살아남기 위하여 또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기막힌 상황에 맞닥뜨렸고, 피난민은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야 하였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을 피하여 남으로 남으로 피난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면서 많은 피난민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산, 김해, 그리고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야 했고, 누울 자리가 있으면 마구간이든 묘지든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내다팔아 부산의 국제시장과 깡통시장, 마산의 부림시장에는 팔지 않는 물건이 없고,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한편 전쟁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려 지주나 경찰, 군인과 그 가족들을 반동분자라고 부르며 처형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부역해야만 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에 협조했다며 살아남았던 사람들을 부역자라 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이들을 빨갱이라고 부르며 그 가족에게도 빨갱이 가족이라 하여 차별하며 처벌 아닌 처벌을 가했습니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온 이들은 이념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반공이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공산 주의 국가인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고 그와 함께 반공 의식도 강화되어 갔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기대어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정치 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 습니다.
1953년 7월 27일에 어느 쪽도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의 총성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전쟁 전의 38도선을 대체 하는 휴전선이 새로운 분단선이 되었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불안한 상태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남과 북을 가르는 휴전선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 채 살얼음 같은 일상과 서로를 향한 적대감과 증오심만을 남기는 선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요?
전쟁이란 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 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은 평화를 사라지게 하고 공포와 불안만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전쟁은 국가 간의 싸움으로만 볼 수 있으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개개인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전쟁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깁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살도 많았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국민 보도연맹과 관련한 학살입니다. 국민보도연맹이란 이승만 정부하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활동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들로 구성된 반공단체를 말합니다. 이 단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일정 수의 보도 연맹원을 만들어낼 것을 주문하였고,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 중에 가입을 한 사람도 상당수가 되었습니다. 공무원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수를 채우기 위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쌀 배급을 미끼로 가입을 권유하였고, 사람 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입을 하였습니다. 별 문제가 없을 것 으로 생각했던 일이었으나 전쟁이 일어나자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였 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보도 연맹원들이 원래 공산주의자이므로 북한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무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고 합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한 경남과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경남 에서 학살된 국민보도연맹 회원은 밝혀진 숫자만 3,500여 명이나 되고, 알려지지 않은 학살까지 포함한다면 전국적으로는 5만~1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념이 달랐던 적이 있다고, 또는 적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추측으로 전쟁 중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헌법에서는 법률에 따라서 재판으로 처벌하도록 하며,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단지 적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처형한 것입니다.
2002년 9월 태풍으로 폭우가 쏟아지면서 마산 여양리 일대에서 163구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묻혀 50여 년 만에 유해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좌익 세력인 빨치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군인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들은 빨치산을 탄압 했던 대상자뿐 아니라 협력했던 사람들도 함께 죽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국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일도 있었습니다.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빨치산의 주활동 무대였던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의 거창, 산청, 함양 등에서 주로 일어났습니다. 이 중 대표적인 사건으로 거창 신원리 민간인 학살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억울한 죽음은 소설에서도 다루어졌습니다.
“너 빨갱이 노래 하나 불러!”
“야아?”
여자가 소스라쳤고, 사람들은 몸을 움츠렸다. 부를 수도 없고, 안 부를 수도 없고, 부르면 빨갱이라 할 것이고, 안 부르면 말을 안 듣는다고 트집 잡을 것이었다.
“귀가 먹었나! 빨갱이 노래 불러보라니까!”
“지는, 지는 노래 부를지 모름더.”
“뭐야? 빨갱이 노랠 안 배웠단 말야!”
“배우기사 했어도 지는 워낙이 노래 재주가 없어서…”
“좋다 그럼 애국가 불러봐.”
여자는, 아이고 살았다, 싶었다. 그래서 추위와 공포로 얼어붙은 몸을 다잡아 노래를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야, 야, 그만! 너 이년, 그럴 줄 알았다. 누구 앞에서 잔꾀 부리고 그래, 이년아. 당장 이리 나와!” 몽둥이가 여자의 몸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교실을 흔들고, 어린애들이 기를 쓰고 울어댔다. 여자의 비명이 맥이 빠져서야 군인은 몽둥이질을 멈추었다.
– 『태백산맥』 8(조정래) 175쪽~176쪽 –
당시 마을 주민들이 무엇을 선택해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국군은 어린이 313명을 비롯한 719명의 신원리 주민을 죽였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1951년 3월 초에 국회 조사 단이 거창을 직접 방문하여 진상 조사에 나섰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학살로 가족을 잃은 것만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을 이중으로 겪었습니다. 국민보도연맹과 민간인 학살 피해 가족들은 연좌제에 물려 당국으로부터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고 취업에 제한받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과정에 발생한 또 다른 비극적인 일로는 국민방위군 사건이 있습니다. 1950년 10월 말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밀리자 정부는 수많은 청장년을 국민방위군으로 동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식량과 보급품이 제때 지급되지 않아 동원된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들이 굶주림 속에서 죽어간 것은 국민방위군 관계자들이 이들 에게 지급할 군수물자와 군량미를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국민방위군 관계자와 정부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최소 10만 명이 아까운 생명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6·25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셀 수없이 많은 사람이 가족과 생이별하였습니다. 특히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남편을 잃은 아내,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된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길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깊은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전쟁은 휴전 상태로 끝이 났습니다.
전쟁과 피난 중에도 민주주의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나요?
1950년 5월 31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국민은 첫 선거를 치른 경험이 있고 2년 동안 국회의원의 활동을 지켜봤습니다. 이번에는 5·10 총선거에 불참했던 사람들도 이번 선거에는 참여하였습니다. 선거 결과는 국회의원 의석 210석 중 무소속 126석, 대한국민당 24석, 민주 국민당 24석, 국민회 14석, 대한청년단 10석 등을 차지하였습니다. 제헌국회와 비교하면 제2대 국회의원은 무소속 당선자 비율이 42.5%에서 60%로 더 높아졌고, 민주국민당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의 당선자 비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국회의원 선거에 그대로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드러나자 이승만 정부를 향한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 이승만은 이를 만회하고자 지지 세력을 모아 새로이 자유당을 창당하였으나 전체 의원 수의 과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당선될 수 없다고 보고, 국민이 직접 투표해 선출하는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제헌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헌법을 바꾸려면 국회에서 재적의원 2/3 이상의 동의를 구해야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회는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을 압도적 반대로 통과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임시수도인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국회 의원이 탄 통근버스를 강제로 끌고 갔고, 국제 공산당 사건을 일으켜 10명의 국회의원을 구속하였습니다. 이를 ‘부산 정치 파동’이라고 합니다. 결국 국회는 이승만 정부의 회유와 강압에 못 이겨 기립 투표로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정당한 절차를 무시하고 군대까지 동원하여 강압과 회유로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 개정안을 억지로 통과시켰습니다. 이 개헌은 대통령 선거의 간선제 부분만 발췌해 직선 제로 바꾸었다고 하여 발췌 개헌이라고 합니다.
한 달 뒤 개헌된 헌법에 따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승만은 2번 연속으로 당선되었고 헌법에서는 중임으로 제한하고 있어 다음 대통령 선거에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정권 연장을 위하여 1954년에 또다시 개헌을 추진하였습니다. 헌법을 개정하면서 헌법을 공포할 당시의 대통령에게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하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길을 열고자 하였습니다. 이 개헌안은 국회에서 1표 차이로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개헌 하려면 국회의원 정족수 203명 중 2/3인 136명이 넘어야 했는데 135명만이 찬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승만 정부는 수학적 반올림의 논리를 내세워 135명의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발표하였습 니다. 203명의 2/3는 수학적으로 135.33333인데 사람을 0.3으로 나눌 수 없으니 숫자상으로 소수점 이하를 버려서 135명이면 통과가 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헌을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정권 연장을 위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헌법을 만든 지 불과 6년 만에 2번이나 개헌을 하였던 것입니다.
국민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불만을 보였습니다. 그 민심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및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정권교체를 외쳤고,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 산다’로 대응하였습니다.
선거 결과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진보당 후보인 조봉암이 ‘평화 통일’을 내세워 30% 이상을 득표하였습니다. 한편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반쪽짜리 승리였습니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다음 선거가 걱정되자 그들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산시켰으며,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작성한 경향신문을 폐간하였습니다. 심지어 야당 의원들의 활동을 방해하려고 정치 깡패 집단도 동원하였고, 야당 의원을 자유당에 들어오도록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1960년에 마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나와 당선된 국회의원을 회유 하여 자유당에 입당시키는 일이 발생하자 마산 시민들은 분노하였습니다.
1950년대 말 외국 기자는“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의 민주 주의는 장기 집권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의 욕망으로 점차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조용한 외침은 점차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