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우리 주열이를 찾아 주세요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1960년 3월, 우리 주열이를 찾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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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우리 주열이를 찾아 주세요
김주열은 누구일까요?
김주열(당시 18세)
주열이의 고향은 전북 남원입니다. 4남 2녀의 둘째 아들로 남원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당시 명문 고등학교인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남원에서 마산까지 온 것입니다.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며 마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발표가 3월 16일로 연기되면서 남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월 15일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따라나서게 되었고, 그 이후 주열이는 사라져 버립니다.
3·15 부정선거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아서 자신들의 생각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습 니다.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인 선거에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1960년 3월 15일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었습니다. 야당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했지만, 당시 86세의 이승만이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다면 권력을 이어받을 부통령이 누가 되는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여당(자유당)과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하였습니다.
3·15 의거
노골적인 부정선거의 모습을 본 마산 시민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야당인 민주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고, 오후부터는 시민들이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는 더욱 결렬해졌고 시민들 뿐 아니라 학생들도 합류하여 부정 선거를 폭로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탕! 탕! 탕!”
시위대를 향하여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 하며 거리로 나왔던 시민들은 경찰이 쏜 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총에 맞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시위는 강제로 진압되었으며 정부는 시위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발표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 습니다. 주열이도 이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그 이후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열이는 어디로 갔을까요?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찬주씨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계속 찾아 헤맸습니다. 워낙 열성적으로 찾아다녀 마산 시민 중에서 주열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애타는 시간이 흐르던 4월 11일 아침, 마산중앙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바로 주열이였죠. 최루탄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무기로 터뜨리면 매운 가스를 내뿜는 것입 니다. 당연히 사람을 향해 쏘면 안 되는 위험한 무기인데 시위를 진압하면서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주열이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 하자 사실을 감추기 위해 바다에 시신을 버린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또다시 시민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전국으로 알려진 주열이의 소식, 4·19 혁명을 만들다
김주열의 죽음은 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이승만 정부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발표만 되풀이했습니다. 결국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격렬한 시위가 이어집니다. 전국에 수십 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경찰의 총에 1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4월 19일의 시위로 이승만 정부는 더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4월 26일 오전,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발표를 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이 편지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인 진영숙 양이 시위에 나서기 전에 어머니께 쓴 편지입니다. 4월 19일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를 기다리다 편지를 써놓고 시위에 합류하러 나갔고 그날 저녁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 습니다. 결국 이 편지는 그녀의 유서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 (중략) ⋯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 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 (중략) ⋯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
3·15 의거와 4·19 혁명은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김주열의 사망 소식을 들은 마산 시내의 8개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쳤고 전국 각지의 시위 현장에 학생들이 앞장섰습니다. 심지어는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습니다. 서울 수송초등 학교 6학년 전한승 군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숨지는 일이 발생하자, 학생들은 ‘부모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대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러한 학생들의 희생을 본 대학 교수들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만약 3·15 의거와 4·19 혁명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부정선거로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더욱더 국민을 무시하면서 독재정치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부당한 권력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독재를 극복하고 보다 민주 적인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주열, 진영숙 같은 수많은 사람이 피 흘리는 희생을 했었죠. 그래서 누군가는 이야기했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