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독립을 위한 의로운 사람들의 의열 투쟁

[민주] 독립을 위한
의로운 사람들의 의열 투쟁

밀양에서 ‘의열단’을 만나다.

의열 기념관

[의열 기념관]
이곳은 1919년 밀양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의열단을 기념하는 의열기념관입니다. 원래 이곳은 김원봉의 생가터이기도 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일제의 고위 관리나 친일파의 처단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이 조직되었습니다. 1920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종로 경찰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습니다. 밀양 출신인 최수봉은 밀양의 독립운동가를 잡아다가 고문했던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의열단에는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최수봉 등 밀양 출신이 많이 참여하였 습니다. 밀양은 1919년 3·1운동 당시 무려 8차례나 만세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독립운동이 활발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 수훈자가 80여 명이 넘을 정도로 밀양은 독립운동의 메카였습니다.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의로운 일을 열렬히하고자 한 독립운동가를 밀양에서 만나봅시다.

현장 체험 활동

의열 투쟁 단체인 의열단의 혼을 찾아 밀양을 방문해 봅시다.

현장 체험 순서

①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 ② 동화학원 터 ③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④ 윤세주 생가 ⑤ 의열 기념관(김원봉 생가터) ⑥ 황상규 생가터 ⑦ 밀양경찰서 터 ⑧ 박차정 의사 묘역

사진으로 만나는
현장 체험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
①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
동화학원 터
② 동화학원 터
진주 교회
③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윤세주 생가
④ 윤세주 생가
진주극장(구 진주좌)
⑤ 의열 기념관(김원봉 생가터)
황상규 생가터
⑥ 황상규 생가터
밀양경찰서 터
⑦ 밀양경찰서 터
박차정 의사 묘역
⑧ 박차정 의사 묘역

현장 체험 활동 후 느낀 점을 적어 보세요.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

경남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 (교동 480)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

밀양 시립 박물관 안에 있는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에는 1919년 당시 밀양의 주요 3·1 만세 운동의 모습을 담은 축소 모형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밀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각종 교육기관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모형을 비롯하여 의열 단과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야외에는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뜨거운 심장과 염원을 표현한 ‘선열의 불꽃’ 상징탑이 있고 탑 주변으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동화학교 터

경남 밀양시 중앙로 372 (내일동 477-7)

동화학교 터

동화학교는 1908년 전홍표·황상규 등이 옛 군관청 자리에 설립한 사립학교로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통해 청년을 교육 하고 자주독립의 애국 사상을 고취하여 항일사상과 항일투사를 육성할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동화학교 에서는 김원봉, 윤세주, 최수봉, 김상윤 등 의열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이들은 학교에서 ‘연무단’이라고 하는 비밀 결사도 조직하는 등 향후 의열단 조직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동화학교는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습니다.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경남 밀양시 해천길 (내일동 516-23)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밀양의 해천은 조선 시대에는 밀양읍성의 해자로 이용되 었습니다. 2015년에 복원된 해천에 항일운동 테마 거리가 조성되었습니다. 이곳이 항일운동 테마 거리가 된 이유는 밀양 출신 독립 운동가인 김원봉, 윤세주, 김병환, 김대지, 정동찬, 전홍표, 황상규, 고인덕, 이장수 등의 생가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김원봉의 생가터에 의열 기념관이 세워졌고, 그 바로 옆이 윤세주 생가입니다. 해천 주변의 건물 담장에는 밀양 3·1 만세 운동,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과 관련된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윤세주 생가터

경남 밀양시 해천길 22-1 (내이동 880)

윤세주 생가터

윤세주(1900~1942)는 김원봉과 함께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동화학교로 옮겨 와 학생운동을 하였습 니다.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한 윤세주는1938년에는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습니다. 1941년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중국 화북으로 올라가 중국 팔로군과 항일 전투에 나섰습니다. 1942년 4만 명의 일본군이 총공 세를 벌인 태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의열 기념관(김원봉 생가 터)

경남 밀양시 노상하 1길 25-12 (내이동 901)

의열 기념관은 2018년 3월에 개관하였습니다. 이곳은 원래 김원봉의 생가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김원봉(1898~1958)은 1919년 11월에 의열단을 창립하고 의백(단장)이 되었고, 1938년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습니다. 1942년 그는 조선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였고 1944년에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귀국하였으나 1948년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월북한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북한에서 국가 검열상, 노동상 등을 역임했으나 1958년 숙청당하였습니다.

황상규 생가터

경남 밀양시 노상하4길 43-1 (내이동 957)

황상규 생가터

황상규(1890~1941)는 동화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습니다. 1918년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에 39명의 1인으로 서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정 담당 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19년 김원봉과 윤세주, 곽재기 등과 함께 의열단 조직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신간회 밀양지회장,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41년 그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10만의 문상객이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기사에는 ‘황상규의 가정은 가난에 가난이 더하여져서 집도, 한 뼘 땅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옛 밀양경찰서 터

경남 밀양시 상설시장 1길 11 (내일동 583-1)

옛 밀양경찰서 터

밀양 출신인 의열단원 최수봉은 이곳에 있었던 밀양경찰 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가 경찰서에서 경찰 19명을 모아놓고 훈시를 하고 있을 때 최수봉은 폭탄 2개를 던졌습니다. 첫 번째 폭탄은 불발이었고, 두 번째 폭탄은 폭발했으나 성능이 좋지 못해 큰 피해는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스스로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상처만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1921년 7월 8일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습니다.

박차정 의사 묘역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산 44-7

박차정 의사 묘역

박차정(1910~1944)은 1910년 5월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21세 때 서울 근우회 중앙집행 위원이 되었으나 이때 항일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투옥 되었습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화북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 였고,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과 결혼하여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습니다. 1939년 그녀는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하여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27일 충칭 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995년 정부는 박차정에게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최수봉 의사 의거 기적비

밀양시 상남면

최수봉 의사 의거 기적비

이 비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최수봉이 살던 마을 입구에 있습니다.

부산에 세워진 박차정 동상

부산 금정구

부산에 세워진 박차정 동상

부산은 박차정 의사의 고향으로 금정 문화 회관 옆 ‘만남의 광장’에 세워져 있습니다.

의열단을 넘어 조선의용대로

1919년 황상규가 창단 과정을 주도하고 김원봉 ․ 김상윤 ․ 윤세주 ․ 한봉근 등의 밀양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의열단은 전후 23차례의 의열 거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일제의 강압적 통치에 분연히 맞섰습니다.

  • 1920.03.~1920.06. 곽재기, 이성우 등이 국내 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운반하려던 의거. 폭탄 16개와 권총 등을 동원하여 거사를 추진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함. (1923년 제2차 의거, 1925년 제3의거를 도모했으나 실패함)
  • 1920.09.14.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사시킴.
  • 1920.12.27.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2개의 폭탄을 던졌는데 1개는 불발되고 1개는 건물 일부를 파손시킴.
  • 1920.09.12.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비서과(불발)와 회계과(폭발)에 폭탄을 던짐.
  • 1922.03.28.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으나 실패함.
  • 1924.01.05. 간토 대지진으로 한국인들을 학살한 것을 응징하고자 김지섭은 도쿄 제국의회 (일본국회)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휴회하자 일본 궁성을 폭파시키려고 했으나 불발로 실패함.
  • 1925.03.30. 이인홍과 이기환이 베이징에서 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임
  • 1925.11. 이종암∙배중세∙고인덕∙한봉인 등이 국외에서 무기를 반입하여 거사를 시도한 사건으로 ‘경북 폭탄 의거’라 불림.
  • 1926.12.28. 나석주가 서울에 있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한 발씩 던지고 경찰관 등 7인을 사살한 뒤 자결함.

1938년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 김원봉과 윤세주는 언제나 함께였습니다.

1937년 7월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중·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무장 독립부대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함께 양쯔강 중류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주로 정보 수집과 포로 심문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1941년 조선의용대 일부대원들이 북상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고, 화북 태항산 지역의 중국 팔로군과 연대하여 싸웠습니다. 이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 독립 동맹의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군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상하지 않고 남아 있던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대원 들은 한국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정하고, 의용대 총대장이었던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에 취임하였습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은 조직과 군사력이 동시에 증대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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