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간 사람들

끌려간 사람들

김복득 할머니 일대기 「나를 잊지마세요」 표지

김복득 할머니 일대기 나를 잊지마세요 표지

“잠깐 이리 와 보래이.”
어디서 본 듯한 얼굴, 그물공장 일 나갈 때 자주 마주친 아저씨였다.
“어데 가?”
“장승포 갑니더.”
“너 여기서 돈 번다고 그물 공장 다니제?”
남자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 따라가면 돈 많이 버는 공장에 취직시켜 줄꺼니께 가자.”
“저, 싫어예. 안갑니더.”
“집에 돈도 보낼 수 있으니까 여기 그물공장보다 훨씬 낫다.”
두려운 마음에 싫다고 했다.
“고마 가자카믄 따라 가지. 왜 여러 소리가 많노.”
“나, 고모 집 가는데 왜 날로 자꾸 가자 그라요?”
울먹이며 가기 싫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남자 손에 끌려 결국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김복득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요?

김복득 할머니는 부산을 거쳐 중국 대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란 1930년대 초부터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 8월 사이에 걸쳐 일본군의 성 위안을 위해 집단적으로 동원하고 관리한 여성을 말합니다.
중국으로 간 김복득 할머니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매일 밀려드는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군인들의 요구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곳을 탈출할 수도 없었고 거부하거나 반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김복득 할머니처럼 일본군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한 여성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터 곳곳에 위안소가 생겨났고, 전쟁이 확대될수록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 타이완, 인도네시아 등 일제가 점령한 지역의 여성들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미얀마 일본군 주둔지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

미얀마 일본군 주둔지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

“모두 열네 명이라. 그중에 둘은 맞아 죽었다. 개 한 마리 죽으면 갖다 묻지. 그런데 그놈들이 우리를 개 취급도 안 했다. … (중략) ….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아홉 시까지 졸병들이 온다. 그러면 이제 아홉 시나 열 시가 되면 장교들이 와. 장교들이 사람을 개 취급 해. (이하 생략)”

–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 –

“병사들은 토요일에는 오후 두 시 혹은 세 시 무렵부터 왔습니다. 일요일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일곱 시까지는 특히 많은 병사들이 찾아왔습니다. 혼자만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장교의 인솔하에 트럭을 타고 왔습니다. … (중략) …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말도 몰랐습니다. 돈도 없고 기차를 타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그곳 주변은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 –

일제는 왜 위안소를 만들었을까요?

1930년대 초반부터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을 침략하는 등 전쟁을 확대해 갔습니다. 전쟁이 확대될수록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사건도 많아지면서 점령지역에서의 일본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습니다. 또한 군인 들이 성병에 걸리는 일도 발생하여 전투력이 약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에서 관리하는 ‘위안소’ 제도가 도입되었고, 일본군은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을 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영장이 나왔어요. 일본 가라는 영장 통지서. 통지서가 나왔는데, 도망 다니고 숨어 다니고 그러다가 잡혔거든요. 빨간 딱지든가 노란 딱지든가 나왔어.”

– 김봉이 할머니의 증언 –

“한 사람은 일본 사람, 둘은 조선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서는 일본에 비단 짜는 공장으로 가서 비단 짜면 돈도 잘 벌고, 좋은 구경도 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어서 집에다가 부모한테 부쳐 주면 부모들이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그런다고 … (중략) … 그때가 내가 열 여섯 살이었지. 그런데 일본으로 간다고 해 놓고는 평양으로 가더라고.”

– 문필기 할머니의 증언 –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위안부’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일제가 전쟁에서 패하자 일본군 ‘위안부’들은 전쟁터에 버려졌습니다. 전쟁터에 그대로 버려두고 군대가 철수하기도 하였고, 폭격으로 목숨을 잃기도 하였고, 나중에 이 일이 알려질 것을 염려해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생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귀국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안소에서 당한 구타나 고문 그리고 성폭력 등으로 인해 평생 치유하기 힘든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 인해 가정을 이루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그리운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긴 세월을 침묵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 습니다. 여성단체들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어서 일본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1924~1997)

김학순 할머니(1924~1997)

수요 시위 모습

수요 시위 모습

미국에서 증언하는 김복동 할머니

미국에서 증언하는 김복동 할머니

프랑스에서 증언하는 이용수 할머니

미국에서 증언하는 김복동 할머니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에서 최초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국내를 비롯한 국제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용기를 얻어 여러 피해자가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이 당한 피해를 증언하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의 범죄 행위를 고발하였습니다. 특히 1992년 1월 8일에 시작된 수요시위는 지금까지도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촉구 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더 이상 단순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세상을 향해 명예와 인권 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피해를 겪는 사람이 없도록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여성 인권·평화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끌려갔나요?

일제는 해방 때까지 지원병, 징병, 징용 등 갖가지 이름으로 수백만에 이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20만 명이 넘는 청년과 학생 수천 명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로 전쟁터로 내몰아 총알받이로 이용했습니다. 또한 전쟁 물품을 만드는 군수공장, 원료를 제공하는 탄광, 물품을 운반하기 위한 철도와 도로 공사현장 등으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끌고 가서 일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끌려간 청년들은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중노동에 시달렸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탈출을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습니다.

“굴 속으로 일하러 들어갈 때는 감독관들이 단체로 인솔하였고, 나무로 된 명표를 탄광 입구에서 전등 달린 모자와 바꾸어 들어갔습니다. 명표를 안 가져온 사람들은 그 날 일을 못하게 됩니다. 일을 못한 사람들은 밥도 안주더라고요. 더러 일이 힘들어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잡혀 오면 심한 구타를 당했어요. 또 일하다가 쉬는 모습을 보이면 감독관이 구타를 하거나 밥을 굶기기도 하였습니다. 참 혹독한 곳이었지요.”

– 강제징용 피해자 주용근씨의 증언 –

훗카이도 샤쿠베쓰 탄광에 강제동원된 노동자들

훗카이도 샤쿠베쓰 탄광에 강제동원된 노동자들

전쟁이 끝난 후 끌려간 사람들은 피해배상을 받았을까요?

개개인에 대한 피해 배상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강제 징용 피해자들도 일본 정부나 기업을 대상으로 피해 배상 소송을 하기도 하였지만 제대로 된 배상 판결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소송이 제기될 때마다 1965년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한일협정을 근거로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한일협정으로 청구권(개인이나 국가에 요청할 수 있는 권리)은 소멸되었기 때문에 개인에 대한 피해 배상 의무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원의 판단은 조금 달랐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 들이 신일본제철이라는 일본 회사를 상대로 한 피해배상 소송에서 우리나라 대법원은 2018년, 회사가 피해자들에게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일본제철은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 였고 이 판결은 한국과 일본과의 외교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일본정부나 기업의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흘러 피해자들은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고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문제로 좁힐 수는 없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는 전쟁 중에 일어난 성폭력 문제이며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입니다. 강제 징용 및 징병도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권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과 국제연합(UN)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표하기도 하였 습니다. 일본에서도 의식 있는 시민들이 한국에 찾아와 사과를 하기도 하였고 수요시위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피해자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뜻과 의지를 기억 하고 전하는 활동도 중요하죠. 지금은 여러 시민단체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에 강제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조형물을 세우기도 하고, 피해자들을 돕고 기록을 남기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 역사관을 만들어 전시 및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한일협정

1965년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은 외교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이승만 정부 때부터 꾸준히 교섭해 왔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하다가 박정희 정부 때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외교를 다시 맺게 됩니다. 하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측의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이 빠진 조약이었기에 국민들은 거세게 반발하였습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하며 한일협정을 체결합니다. 한일협정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경제 협력 자금을 받았지만 청구권(개인이나 국가에 요청할 수 있는 권리)을 포기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이후 강제징용 피해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거제 조형물 거제시 장승포동

거제 조형물 거제시 장승포동

김해 조형물 김해 연지공원

김해 조형물 김해 연지공원

남해 조형물 남해 숙이공원

남해 조형물 남해 숙이공원

산청 조형물 산청 청소년수련관

산청 조형물 산청 청소년수련관

진주 조형물 진주 교육지원청

진주 조형물 진주 교육지원청

창원 조형물 창원 오동동

창원 조형물 창원 오동동

창원 조형물 경남교육청 제2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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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조형물 통영 남망산 언덕

통영 조형물 통영 남망산 언덕

하동 조형물 하동 취간림

하동 조형물 하동 취간림

차별과 수탈에 맞서다차별과 수탈에 맞서다
마산 하모니카촌우리 땅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