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부마 민주 항쟁에서 6월 민주 항쟁까지
경남의 민주·인권·평화,
어디까지 가 봤니?
[민주] 부마 민주 항쟁에서 6월 민주 항쟁까지
그 현장을 다시 거닐다.
경남의 민주·인권·평화, 어디까지 가 봤니?
[민주] 부마 민주 항쟁에서 6월 민주 항쟁까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수많은 대학생이 모여 “유신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부마 민주 항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는 부산의 도심으로 점차 번졌고 시위대의 규모가 더욱 커지자 정부는 10월 18일 부산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하여 진압하였습니다. 한편 10월 18일에는 마산의 경남대학교 앞에 1,000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하였고, 마산 3·15 의거탑과 창동 거리 등을 중심으로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후 마산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10월 20일 정부는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까지 동원해 시위를 강제로 진압하였습니다.
부마 민주 항쟁은 유신 체제의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일어난 대표적인 항쟁으로 이후 1980년 5·18 민주화 운동과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 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마 민주 항쟁의 현장을 거닐며 그들이 외친 민주화의 요구를 다시 만나 봅시다.
현장 체험 활동
유신 체제의 억압과 통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일어난 부마 민주 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외쳤던 6월 민주 항쟁의 현장을 만나 봅시다.
현장 체험 순서
① 10·16 부마 민중 항쟁 기념탑(부산대학교) → ② 부산의 6월 민주 항쟁, 부산 가톨릭 센터 → ③ 부산 민주 공원 → ④ 10·18 부마 민주 항쟁 시원석(경남대학교) → ⑤ 부마 민주 항쟁의 또 다른 현장, 마산 3·15 의거탑 → ⑥ 6월 민주 항쟁 30주년 기념 동패(창동 거리)
사진으로 만나는
현장 체험
현장 체험 활동 후 느낀 점을 적어 보세요.
10·16 부마 민중 항쟁 기념탑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3번길 2 (장전동)
1960년 3월 15일 마산 장군동 투표소에서 미리 투표 용지를 넣어 둔 투표함이 발각되었습니다. 9시에는 선거 번호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민주당 마산시당 사무실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에 민주당 간부들이 당사 주변에서 부정선거 무효 선언을 외쳤고 이 소식을 들은 마산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위 규모는 점차 커졌습니다.
3월 15일 오후 2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에 모인 600 여 명의 시위대는 불종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시위대는 마산시청 개표장으로 모일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부산 가톨릭 센터
→ 부산광역시 중구 중구로 71 (대청동4가)
부산 가톨릭 센터는 1982년 세운 건물로 ‘부산의 명동성당’ 으로 불리며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전국적 민주 항쟁의 상징적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1987년 6월 16일 오후 6시경 남포동, 대청동, 충무동 일대에서 1만여 명을 헤아리는 학생, 시민들이 시위하던 중 경찰의 강경 진압을 피해 380 여 명이 부산 가톨릭 센터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센터에 남아 계속 시위를 이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시민들은 가톨릭 센터 앞에서 시국 토론회 등을 열어 6월 민주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부산 민주 공원
→ 부산광역시 중구 민주공원길 19
영주동 산마루에서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는 자리에 마련된 부산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공간입니다. 4·19 혁명과 부마 민주 항쟁, 6월 항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부산 시민의 민주 희생 정신을 기리고 계승 발전하고자 건립되었습니다.
민주 항쟁 기념관에는 지난 100년간 자주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우리 민족의 모습을 담은 ‘민주 항쟁 기념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 관련 각종 도서, 인쇄물, 물품 전시 및 당시 수형 시설 등을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경남대학교 부마 민주 항쟁 시원석
→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
부마 민주 항쟁 시원석은 2009년 10월 18일에 항쟁 30 주년을 맞이하여 경남대학교 내에 세워졌습니다.
부산대학교에서 항쟁이 일어난 지 이틀 뒤인 1979년 10월 18일에 경남대학교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 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한 학생이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고, 이에 많은 학생이 호응하면서 교내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학생 시위에 놀란 학교 당국은 교내 방송으로 휴교를 알렸습니다. 대학생들은 교문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지 못하자 3·15 의거탑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또 다른 현장, 3·15 의거탑
교문 앞 경찰의 저지선을 우회하여 빠져나온 대학생들은 10월 18일 오후 5시경에 3·15 의거탑에 모여들었습니다. 일부 학생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나머지 학생들은 창동 거리로 향하며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시위대에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며 그 규모는 점차 커졌습니다. 시위로 인해 남성동 파출소, 산호동 파출소 등이 불탔습니다. 그러나 경찰과 동원된 군인들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정부는 10월 20일 마산에 위수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였습니다.
창동 거리 6월 민주 항쟁 30주년 기념 동판
이 동판은 2017년 6월 민주 항쟁 30주년을 맞이하여 만들어졌습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열린 박종철 추도의 날에는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역에 모여 경찰과 대치하였습니다. 6월 9일에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는 소식에 다음 날 마산에서는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경찰이 쏜 최루탄으로 한국-이집트 축구 경기가 중단되자 불만을 가진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하며 규모는 커졌습니다. 6월 민주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6·29 선언을 마침내 이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