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 살고 싶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땅에 살고 싶다!
Democrati
우리 땅에 살고 싶다!
우리 국민은 어떻게 형성되었나요?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광복은 빛을 다시 찾았다는 의미로 35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땅에 우리의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독립된 나라가 되려면 국민과 영토, 그에 따른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광복을 맞아 우리의 땅을 비로소 되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땅을 되찾게 된 것은 일제의 억압에도 꿋꿋하게 견디고 살아낸 우리 국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은 광복으로 뜨거운 가슴을 안고조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 일제의 억압과 수탈을 피하여 떠났던 사람, 징용과 징병으로 강제로 이 땅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도 귀국선에 몸을 싣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부산항으로 들어온 귀환자는 무려 140만명이나 되었는데, 이들 중 2만 5천여 명이 마산으로 들어와 정착하였습니다.
이때 미군과 소련군도 자기 나라의 필요에 따라 한반도에 들어와 38 도선을 경계로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들이 그은 인위의 경계선인 38도선이 분단의 선으로 굳어져 가자 이 땅의 사람들은 사정에 따라 누구는 남쪽으로, 또 누구는 북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이 땅에는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 살고 있던 이들과 국외에서 돌아온 사람, 그리고 38도선을 넘어 내려온 이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이력을 지닌 이들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고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주었던 친일파가 그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친일파 처벌에 관한 관심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기대와는 달리 미군정은 자신들이‘38도선 이남의 유일한 통치 기구’임을 내세우며 혼란을 막는다는 이유로 현상 유지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일제가 항복한 이후 숨죽여 지내던 친일 세력은 다시 군인, 경찰, 관리로서 돌아와 활보하였습니다. 권력을 다시 장악한 이들에게 이 땅은 해방된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에게 적대적이던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다시금 탄압하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졌습니다.
광복으로 빛과 자유를 되찾았으나 세상은 여전히 일제의 망령이 살아 숨 쉬는 어수선하고 복잡한 해방 정국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반민족 행위자’를 어떻게 처벌했을까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6월에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44년 8월 26일에 프랑스 망명정부의 드골 장군이 파리에 입성 하면서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지배에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는 나치 지배하에서 나치에 협력한 자에 대한 처벌에 나섰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약 150만 명을 조사하여 이들 중 4만여 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을 거쳐 처형된 사람만 700여 명이었으며, 재판 없이 즉결 처분된 사람을 포함하면 1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후 대통령이 된 드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 몰라도 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보다 10배나 길었던 36년 동안 일제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기간 일제에 협력하여 민족을 억압했던 친일파의 수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광복 이후 이들의 청산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큰 과제였습니다.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0월에 만들어진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반민법)’은 친일파들을 청산하겠다는 우리 민족의 여망을 담은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친일파 조사를 위한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부조차도 친일파 처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들은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반민특위를 오히려 습격하여 수사관들을 체포해가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반민특위는 친일파에 대하여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못한 채 1년여 만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반민특위는 680여 건의 친일 행위를 조사하였는데, 재판 중 판결이 확정된 것은 38건에 불과하였습니다. 형량도 사형 1건, 징역 12건, 공민권 정지 18건이었습니다. 이마저도 6·25 전쟁이 일어 나자 형량을 제대로 집행하지도 못하였고 친일파 청산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취급 건수 | 영장 발부 | 기소 | 재판 대상 | 사형 | 무기 징역 | 유기 징역 | 집행 유예 | 공민권 정지 | 무죄 | 형 면제 |
---|---|---|---|---|---|---|---|---|---|---|
688 | 408 | 293 | 41 | 1 | 1 | 8 | 5 | 18 | 6 | 2 |
우리 민족이 새로 만들고 싶었던 나라는요?
광복이 되자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던 지도자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장차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발표한 국가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공통된 생각이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공화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정당을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정당과 정치 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 단체의 모습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인이면 만인이 다른 색깔로 보일 정도로 정치적 견해는 다양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당을 세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정당도 있었으며, 이들 둘 사이 어디쯤엔가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정치 단체들로 붐볐습니다. 정치 단체들은 정치적 견해가 공산주의에 가까우면 좌파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공에 가까우면 우파로 분류되었습니다. 만인이 만 가지 색깔을 내는 다양성에도 불구 하고 이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단 하나, 민주 공화국 수립이었습니다. 그러나 각 정치 단체들의 의견은 작은 부분에서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친일파 청산의 문제, 당시 시급하였던 농지 개혁의 문제,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의 처리 등 개별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그 차이는 만인의 만 가지 생각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 문제는 나라를 세우기 까지의 과정이 어려울 것이란 예고편과도 같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견은 커져만 갔고 이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단계로 점차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부었던 사건이 1945년 연말에 불어 닥칩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 장관들이 모여서 한반도의 문제를 논의하고 그 과정 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가 결정되었습니다.
한국민주당
(김성수)
미군정의
정책을
지지합니다!
독립 촉성 중앙협의회
(이승만)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웁시다!
한국독립당
(김구)
친일파를 청산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합시다!
조선인민당
(여운형)
좌파와 우파가
연합하여 정부
수립에 나섭시다!
남조선 노동당
(박헌영)
공산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웁시다!
-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여 민주주의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가혹한 정치의 잔재를 급속히 없애기 위하여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 조선 임시 정부의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군과 소련군 대표자들로 미소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
- 조선의 발전과 독립 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수립할 때는 임시 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 아래 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공동위원회는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해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국 정부가⋯(중략)⋯ 참고할 수 있도록 방안을 제출하여야 한다.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문(1945.12.) –
단, 전제 조건으로 우리나라에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았으나 우리 민족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겨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이민족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이 땅의 사람이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더욱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전제 조건이 알려지지 않은 채 신탁통치를 소련이 주장하여 결정되었다고 하자 전국에서는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소련에 반대하는 집회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진실은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미 세상은 반탁운동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전제 조건이던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실현 하려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해야 하였으나 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버렸습니다. 이제 반탁과 찬탁이라는 이분법만 존재하게 되었고 정국은 반탁을 주장하는 우파와 찬탁을 주장하는 좌파로 명확 하게 분리되어 갔습니다. 좌파와 우파는 광복 이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식마저 따로 진행할 정도였습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의 대립은 경남에도 영향을 미쳐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신탁통치 반대, 또는 신탁통치 지지 대회가 열려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 단체들은 각자의 주장을 밀어붙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북쪽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정부 조직을 갖추려고 하였습니다. 양쪽의 분립 움직임을 안타깝게 바라본 중도 진영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하여 여러 정치 세력 들을 아우르는 단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우리의 민족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미국과 소련은 좌우합작위원 회를 통하여 난국을 돌파하고자 하였으나 현실은 생각했던 대로 흘러 가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하여 한반도에 단일정부를 수립 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서로에게 우호적인 세력과 결탁하여 남과 북에 각각 정부를 세우기로 합니다. 이제 38도선은 우리 민족을 둘로 가르는 분단의 경계선으로 더욱 단단 하게 굳어져 갔습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분단의 상황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가운데 정부 수립의 문제는 유엔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광복 직후 여론조사에서 국민은 어떤 나라를 원했을까요?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선구회는 여론조사를 하였습니다. 여론 조사 중에 ‘새 나라의 정치 체제로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민주주의 정치 체제(28%), 입헌 정치 체제(21%), 진보적 민주주의 정치 체제(16%), 사회적 민주주의 정치 체제(15%), 사회주의 정치 체제(9%), 신민주주의 정치 체제(7%), 기타(4%) 등을 답변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과거의 군주제로 돌아가기보다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주의를 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