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against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마산의 발전을 이끈 한일합섬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경제개발 정책이 추진된 1960년대부터 특히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에는 커다란 공장이 생겨났습니다.
1967년, 마산에서 한일합섬 공장이 세워졌습니다. 당시로서는 어마 어마한 규모의 공장이었고 마산 수출의 90%를 담당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70년에 문을 연 수출자유지역과 함께 마산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면 일터로 나가야 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벌어서 가족들을 위해 돈을 모아야 했죠. 한일합섬도 예외는 아니라서 공장 내부는 앳된 여성 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힘든 환경 속에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3·15 부정선거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아서 자신들의 생각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습 니다.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인 선거에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1960년 3월 15일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었습니다. 야당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했지만, 당시 86세의 이승만이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다면 권력을 이어받을 부통령이 누가 되는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여당(자유당)과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하였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23살의 한 청년이 서울의 평화시장 앞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스스로 불을 붙였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자신의 몸이 불타는 중에도 온 힘을 다해 구호를 외쳤고, 결국 병원에 실려 갔지만 그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왜 전태일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는 선택을 하였을까요? 그가 죽기까지 외쳤던 근로기준법은 무엇일까요?
서울의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자신도 힘들게 일했지만 자신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어린 소녀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습니다. 당시 옷을 만드는 공장 안에는 평균 연령 18세의 어린 여성들이 하루 15시간씩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다 보니 허리를 펼 공간도 없었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아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일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월급은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을 위해 적은 돈이 라도 보태야 했으니까요.
이런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된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인 ‘근로 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근로 기준법에 있는 내용과 현실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알리기 위해 노력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였 습니다.
15세의 어린 시다들은 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하여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을 앓으면서도, 그 병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 (중략) …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 시간을 10~12시간으로 단축해 달라는 것입니다. 1개월에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 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 편지 중에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전태일은 동료들과 함께 ‘바보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여 알리기도 하고, 노동청에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현실을 바꿔 달라고 신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태일은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회사의 사장도, 나라도 근로 기준법을 지킬 의지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이런 현실을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전태일은 동료들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벌이기로 계획했습니다. 지키지도 않을 법이라면 불태워 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고 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죠.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근로 기준법과 함께 스스로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구호를 외쳤습니다. 놀란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지만 이미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병원에 실려 간 후 겨우 깨어난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남은 사람들은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뜻을 이어가기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람들은 열악한 노동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고 노동 운동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결국 전태일의 희생은 이후 우리나라 노동자의 인권 개선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의 죽음
전태일의 희생이 있은지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노동자들의 인권이 잘 보호되고 있을까요? 물론 과거에 비하면 매우 좋아졌습니다. 노동 시간도 줄어들고 임금도 많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열악한 환경 에서 일하며 인권이 잘 보호되지 않는 곳도 분명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현장 실습생,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과 차별, 아르바이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침해 사례 등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노동인권과 관련해서 ‘근로기준법’에 규정을 두고 있지만 피해 사례는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50여 년 전 전태일이 꿈꾸었던 노동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관심과 노력이 계속 필요합니다.